[서울이야기] 목멱산과 청학동천의 문화유산 둘러보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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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과 청학동천의 문화유산 둘러보기(3)

 

글. 최연 | 일촌공동체 이사

 

목멱산과 청학동천의 문화유산 둘러보기 세번째 연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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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쪽 기슭에 남아 있는 장충단(獎忠壇)은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여러 장병들을 제사 지내던 곳으로 본래의 위치는 지금의 신라 호텔 자리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장충단을 허물고 그곳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개인 사당을 짓고 이름도 박문사(博文祠)로 바꾸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옮겨와 정문으로 사용하였기에 그 이후 장충단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올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넋을 기리는 제향공간을 나들이 다니는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장충단을 지나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목멱산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도성이 잘려나가고 지금은 그 언저리에 호텔이 들어서 있습니다만 조선 초기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남쪽의 작은 문에 해당하는 문은 광희문(光熙門)도 있고 남소문(南小門)이라고 부르는 문이 하나 더 있었음으로 조선 초기에는 도성을 드나들던 문이 4대문과 5소문의 9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소문이 위치한 곳이 너무 높아서 백성들이 잘 다니지 않고 광희문 쪽으로 돌아 다녔기 때문에 이 문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고개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더불어 벌아현(伐兒峴)이라고 불렀습니다.

한양(漢陽)의 종조산(宗祖山)에 해당하는 삼각산 세봉우리 중의 하나인 인수봉은 수려한 자태를 뽐내지만 허리 부분쯤에 조그마한 바위가 불거져 나와 있어 그 모양이 멀리서 보면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 품속을 벗어나면 위험함으로 때로는 혼내주고 때로는 얼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혼내 준다는 벌아현과 떡으로 달랜다는 떡전고개(阿峴)의 지명이 생겼으며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혼내고 달래며 엄마 등에서 가만히 있기를 바라던 마음에서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벌아현은 지금의 약수동 고개에 세워진 지하철역인 버티(벌주는 고개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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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자락에는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하여 12정승을 배출한 명당 터인 동래(東來) 정씨(鄭氏) 세거지(世居地)가 있었으나 지금은 우리은행 본점 앞에 큰 은행나무가 그 영광을 대신하여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숭례문 옆에 있었던 상평창(常平倉)은 곡식의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곡식을 사들이고 내다파는 일을 하던 곳으로 상평(常平)이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줄임말로 풍년이 들어 곡가가 떨어지면, 곡물을 사들여서 곡가를 올리고, 흉년이 들어 곡가가 폭등하면 상평창의 곡물을 풀어서 곡가를 떨어뜨리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공납(貢納)과 진상(進上)으로 거둬들인 곡물이나 특산물을 보관하던 기관인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인 선혜창(宣惠倉)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상평창일 때는 곡물만 있어 난장(亂場)이 서지 않았고 선혜청 창고로 바뀌면서 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거래될 수 있는 난장이 섰는데 이를 일러 새로 들어선 창고(宣惠倉) 안에 펼친 난장이라는 뜻의 신창내장(新倉內場)이라 하였고 지금의 남대문 시장을 말하며 그 흔적이 남창동(南倉洞), 북창동(北倉洞)이라는 동네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쪽자락에는 외국인들을 일컫는 이타인(異他人)들이 살았던 곳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이(還鄕女) 얼굴의 모양새가 다른(異胎) 자식들과 함께 모여 살던 곳이고 임진왜란 이후 미처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한 일본인들도 이곳에서 모여 살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도 이태원(이태원)이라 부르며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멱산의 남쪽 기슭인 용산(龍山)이 일본군과 중국군과 미군이 차례로 점령하여 머물던 외국군 주둔지인 것도 한번 새겨볼 일입니다.

그리고 목멱산의 상징인 ‘남산 위의 저 소나무’도 이곳 남쪽 기슭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곳을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여 훼손을 방지하고 조림, 육성하고 있어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의 멋있는 자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목멱산 북쪽 자락에는 일본인들과 연관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산 3호 터널 입구인 인현동에는 일본의 사신이 머물면서 묵었던 동평관(東平館)이 있었고 남산 1호 터널 입구 옛 중앙정보부 자리에는 조선통감(朝鮮統監)의 관저(官邸)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는 목멱산 전체에 조선신궁을 건설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목멱산 아래 본정방(本町坊 : 지금의 명동)에는 일본인 상권(商圈)이 형성되면서 종로와 동대문의 조선인 상권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목멱산 아래 명동일대는 지금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제일 선호하는 관광코스이기도 하여 최근에는 인현동에서 남산 순환도로에 이르는 가파른 언덕길 골목에는 일본 관광객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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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일상에서 마주하는 서울 곳곳의 장소들이 새삼 새롭게 느껴집니다. 저는 1호선 방학역에서 6호선 석계역을 거쳐 망원역까지 오는 일정으로 늘 출/퇴근을 하는데요, 최근 연재된 목멱산 부근의 이야기를 접하니  늘 익숙하게 접해왔던 6호선의 ‘버티고개’, ‘이태원’, ‘삼각지’ 등의 명칭들이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간 목적지 외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제게 ‘주변을 둘러보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주기도 했지요^^;;

서울이라는 지역은 참 넓어서 내가 사는 지역만 제대로 알아도 참 많이 알겠다 싶지만, 일촌에서 연재하는 [서울이야기]를 통해 내가 사는 지역, 그리고 우리 이웃이 살아가는 지역의 과거 그리고 지금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미있는 서울이야기는 다음호에도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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