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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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1)

 

글.  최 연 | 일촌공동체 이사

한양도성(漢陽都城)의 북쪽에 있는 주산(主山)인 백악(白岳)에서 동쪽으로 낙산(駱山)에 이르는 좌청룡(左靑龍)의 산줄기에서 가장 높게 솟아 오른 봉우리가 응봉(鷹峰)입니다. 응봉은 내사산에는 해당되지 않음에도 도성 안 운종가(雲從街)까지 준수한 산줄기를 뻗친 범상치 않은 봉우리로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그리고 종묘(宗廟)와 성균관(成均館)을 품고 있습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양궐(兩闕) 체제에서 북궐(北闕)인 경복궁(景福宮)과 함께 동궐(東闕)로서 임금이 통치행위를 하던 정궁(正宮)이며, 고대국가의 왕은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서 왕의 씨앗이 이어져 세습됨으로 그 씨앗의 근원인 역대 왕들을 잘 받들어 모시는데 이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때 맞춰 제사를 지내는 곳이 종묘입니다.

성균관은 조선의 국립대학으로서 조선시대는 중국과 베트남과 같이 과거(科擧)를 통해서만 관직(官職)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성균관은 조선을 이끌어 갈 인재들을 길러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궁궐 등, 국가기관들이 좌청룡 능선에 있는 응봉으로부터 남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응봉이 명당을 품은 좋은 기운이 서려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청와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응봉을 군부대가 깔고 앉아 있습니다.

조선이 건국되고 개성(開城)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한 초기에는 한양의 행정구역은 북악(北岳) 아래의 북부, 낙산(駱山) 아래의 동부, 목멱산(木覓山) 아래의 남부, 인왕산(仁王山) 아래의 서부, 청계천(淸溪川) 주변의 중부 등, 크게 5부(部)로 나누었으며 부를 촌(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백악의 경복궁과 응봉의 창덕궁 사이에 있는 부락을 북촌(北村), 목멱산 아래 동네를 남촌(南村), 낙산 아래를 동촌(東村), 인왕산 아래를 서촌(西村), 청계천변을 중촌(中村)이라 하였고 대체로 북촌과 동촌, 서촌에는 출사(出仕)한 사대부가, 남촌은 출사하지 못한 사대부와 무인(武人)이, 중촌에는 역관(譯官), 의원(醫員), 화원(畵員) 등 기술직(技術職) 중인(中人)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중인이 살았던 중촌을 제외한 동서남북 네 개의 촌(村)은 양반들의 주거지로서 조선중기 붕당(朋黨)의 이름이 이것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동인(東人)은 김효원(金孝元)이 동촌에, 서인(西人)은 심의겸(沈義謙)이 서촌에 살았기 때문에 그 일당을 동인과 서인으로 불렀으며 동인이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뉠 때는 남촌에 사는 일당을 남인, 북촌에 사는 일당을 북인이라 불렀으나 그 일당 모두가 그곳에 살았다는 것은 아니고 중심인물을 비롯하여 대부분이 그곳에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색당파(四色黨派)의 주거분포가 조선후기에 서인의 노론(老論)에 의해 일당 지배체제가 완성되면서 차츰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입지적 조건이 가장 좋은 북촌에는 노론이, 서인이지만 노론에게 밀린 소론(小論)과 동인으로 한때 정권을 잡은 북인은 동촌과 서촌에, 사색당파 중 가장 세력이 약했던 남인과 무인들은 남촌에 다수가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북촌에는 아흔 아홉 칸 규모의 고대광실의 사대부집이 많았는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 대감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가 허물어지고 그곳에 조선의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이, 다음으로 창덕여고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영, 정조 시대의 실학(實學)을 계승하여 북학파(北學派)를 일구고 다시 개화파(開化派)를 낳게 한 선구자로서 실학과 개화사상(開化思想)을 이어준 근대의 가교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선배인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金邁淳), 조종영, 홍석주(洪奭周), 윤정현(尹定鉉)을 사숙(私塾)하였고, 문우(文友)인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金尙鉉), 신응조(申應朝), 윤종의, 신석우(申錫愚) 등과 교유하였으며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등은 그 문하에서 배출된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북촌, 박규수의 집 사랑방에 개화사상에 목말라하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을 불러 놓고 자신이 손수 만든 ‘지구의(地球儀)’를 보며 중국 중심주의가 해체되어 가는 국제현실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박규수는 중국에 사행(使行)을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 1860년 영, 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청의 함풍황제가 열하로 피난을 가자 조선정부의 위문사행단(慰問使行단)의 부사(副使)로 조부인 연암이 다녀왔던 길을 똑같이 다녀왔고, 두 번째 사행(1872년)은 정사(正使)의 직위로 다녀왔는데 이때 박규수는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에 힘썼고 당시 중국에서 진행되던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영향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와서 북학을 계승한 개화사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박규수 집터에는 지금 서울에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크고 건강한 백송(白松)이 우뚝 서 있는데 백송은 북경(北京)이 원산지로서 중국에 사행을 다녀온 북학파들에 의해 조선으로 들여왔으며 그래서 북학파 사람들과 관련 있는 집에는 백송을 반드시 심었습니다.

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2)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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