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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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2)

 

글. 최 연 | 일촌공동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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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위 ‘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1)’을 클릭해 주세요,

 

응봉에서 낮은 산줄기에 쌓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도성 밖은 한양오경(漢陽五景) 중의 하나인 ‘북둔 도화(北屯桃花)’의 절경을 품고 있는 성북동천(城北洞天)이고 도성 안으로는 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성균관에 속한 노비들의 주거지역인 반촌(泮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양오경 이라 함은 한양에서 경치가 좋은 다섯 곳을 이르는 말로 ‘인왕산 살구꽃’ ‘세검정 수석(壽石)’ ‘서지(西池) 연꽃’ ‘동대문 밖 버드나무’ 그리고 ‘북둔 도화’ 로 성북동천에는 복숭아꽃이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북둔(北屯)이라는 지명은 도성 밖 북쪽을 방어하기 위해 탕춘대(蕩春臺 :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에 설치된 총융청(摠戎廳)의 북쪽 주둔지가 성북동천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국립대학으로 한양(漢陽) 천도(遷都) 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천도 전 개경(開京)에 있었던 것으로 고려 말에 중국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처음 들여온 안향(安珦)이 유학(儒學)을 널리 펴고자 성균관을 건립하면서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관료들에게도 모금을 하여 이때 모은 돈으로 중국으로부터 경전(經典)과 역사서(歷史書) 등을 수입하여 성균관의 면모를 일신하였습니다.

이때 안향은 자신의 소유인 3백여 명의 노비(奴婢)도 함께 희사하여 성균관의 소속노비로 만들었는데 한양으로 천도를 할 즈음에는 그 노비의 자손들이 수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성균관을 달리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는 것은 천자(天子)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벽옹(辟雍)이라 하고 제후(諸侯)의 나라에 설립한 학교를 반궁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벽옹이란 큰 연못 속에 지은 집을 말하는데 벽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속에 있기 때문에 동, 서, 남, 북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반궁은 동쪽과 서쪽 문을 연결하는 부분만 물로 채워져 있어 벽옹에 비해 물이 반밖에 되지 않아 그물을 반수(泮水)라 하였고 반수에 있는 집이라 반궁(泮宮)이라 불렀습니다.

성균관에 소속된 수천 명의 노비가 반수와 반궁의 주위에 집을 짓고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어 이를 반촌(泮村)이라 하였고 반촌에 사는 노비들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주로 성균관의 잡역(雜役)을 세습적으로 맡아 보았습니다. 어린아이는 성균관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각 방에 소속되어 유생(儒生)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재직(齋直)으로 일했고 이들이 성장하면 성균관의 제향(祭享)과 관련된 육체노동을 하는 수복(守僕)이 되었습니다. 반촌은 성균관과 공적(公的)인 관계 뿐 만 아니라 유생들과 사적(私的)인 관계도 맺어서 때로는 성균관 유생들이 방을 잡아 공부하는 하숙촌의 역할도 했고, 과거시험 때에는 응시자들이 머무르는 일종의 여관촌 역할도 하였으며, 특별한 경우 성균관 유생들의 이념서클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통치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불온시 하였으며 특히 천주학은 참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균관 유생이었던 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이 강리원(姜履元)과 함께 과거공부를 핑계로 반인(泮人)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천주교(天主敎) 교리를 학습하다가 발각되었는데 이들이 모두 사대부 자제들이고 앞으로 조선을 이끌어 갈 동량(棟樑)들이라 참형은 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촌의 가장 특이한 역할은 그곳에서 도살(屠殺)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소의 도살을 법으로 정해 금지할 정도로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이를 위해 금살도감(禁殺都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하면서 까지 소의 도살을 막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소고기는 유통되었고 밥상에도 올라 왔습니다.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儀)>에 의하면 나라 전체에 하루에 5백 마리의 소가 도살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도살된 소는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제사나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호궤(犒饋) 때 주로 쓰였고, 한양에는 성균관과 5부(部)안에 24개의 푸줏간이 있었고, 지방의 3백 여 고을에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이 있었다고 합니다.이는 분명 조직적으로 도살하는 곳이 있어야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아무리 금지하여도 먹는 음식인지라 단속과 처벌이 느슨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도살의 본거지가 바로 반촌이었습니다.

반촌에서 소를 도살하게 된 연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성균관 학생들의 식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성균관의 노복들로 고기를 팔아서 생계를 하게하고 세(稅)로 바치는 고기로 태학생(太學生)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인들의 도살이 가능했던 것은 반인을 이루는 노비들이 대부분 여진족 또는 말갈족들로서 이들은 유목생활(遊牧生活)을 하며 도살을 생활로 하던 종족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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