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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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3)

글.  최 연 | 일촌공동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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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호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위를 클릭하세요 ^^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서울의 성균관과 사부학당(동부, 서부, 남부, 중부 학당) 그리고 지방의 향교(鄕校)와 같이 나라에서 운영하는 관학(官學)과 서당(書堂)과 서원(書院)과 같은 재야 지식인인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학(儒學)을 치국 이념으로 내세워 유교정치를 펼쳤던 조선왕조는 관학교육을 강화하였는데 초시(初試)에 합격하여야만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 할 수 있고 오직 성균관을 통해서만 본고사에 해당되는 정시를 치룰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정시에 합격해야만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향교는 지금의 학제(學制)와 비교해 보면 지방의 국립고등학교로 향교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는데 여기서 다시 수학하여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고급관직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향교는 단순한 과거(科擧)를 준비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양식 있는 선비들은 관학을 기피하여 배우려는 학생들이 모자라게 되어 향교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고 마침내 성리학(性理學)의 학풍을 이어가려는 사림(士林)들이 앞 다투어 서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사림은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그의 문하(門下)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야은(冶隱) 길재(吉再)로부터 시작하여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세력이 커져 갔습니다. 이들은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했고 경학의 기본사상을 성리학에서 구했습니다.

관학에 해당되는 성균관과 향교에 배향되는 선현(先賢)들은 공자(孔子)를 필두로 하여 네 분의 성인(4聖), 공자의 수제자 열 명(10哲), 송나라 여섯 명의 현자(宋朝6賢), 공자의 제자 중 72명의 현자(孔門72賢), 한, 당, 송의 22명의 현자(漢唐宋22賢), 그리고 우리나라 18명의 현자(東國18賢) 등 모두 133분을 모시게 되어 있습니다만, 격과 규모에 따라 대체로 그 수를 줄여서 모십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18분의 현자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입니다.

향교와 서원 등은 대부분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건물배치로서 앞쪽이 공부하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이고 뒤쪽이 배향하는 사당공간(祠堂空間)입니다만,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성균관의 건물배치는 일반적인 배치와 반대로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앞쪽에 공자 등을 배향하는 대성전(大成殿)이 위치하고 뒤쪽에 공부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배향공간인 대성전 좌우에는 133위 중 대성전에 모시지 않은 나머지 위패를 모시는 행랑(行廊)인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배치되어 있고 강학공간인 명륜당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마주보고 있습니다.

명륜당을 바로 보고 오른쪽에 있는 동재는 선배들이, 그 반대편 서재에는 후배들이 사용했으며 성균관 유생의 인원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대략 200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륜당 앞뜰에는 수령이 4, 5백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고, 향교와 서원의 뜰이나 정문 앞에도 백 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古事)를 본떠 향교나 서원에 은행나무를 심게 된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응봉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방향을 약간 남쪽으로 꺾어 솟구치며 낙산을 일구는데 그 안부(鞍部)에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이 있습니다. 원래 북소문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성종(成宗) 때 세 분 대비(大妃)를 위해 별궁(別宮)인 창경궁(昌慶宮)을 짓고 그 정문의 이름을 홍화문이라 하여 할 수 없이 창경궁에게 그 이름을 내주고 달리 혜화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낙산은 그 모양이 낙타와 같아서 낙타산(駱駝山), 또는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하며 낙산의 서쪽산록에 있는 쌍계동천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은 물이 흘렀으며 특히 ‘낙타유방’에 해당하는 두 곳에 ‘이화동 약수’와 ‘신대약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 다음편에서는 “쌍계동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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