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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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좌청룡과 쌍계동천 둘러보기(4)

글. 최 연 | 일촌공동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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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동천에는 태종 때 재상(宰相) 박은(朴訔)이 백림정(柏林亭)을 짓고 주위에 잣나무를 심어 풍류를 즐겼으니 이 때문에 백동(柏洞) 또는 잣나무 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신숙주(申叔舟)의 손자로 중종 때 학자였던 신광한(申光漢)도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 하였고 이 때문에 신대동(申臺洞) 또는 신대골이라 는 지명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거소인 석양루(夕陽樓), 배꽃이 만발했던 배밭 가운데 지은 이화정(梨花亭), 영조시대의 문인 이심원(李心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이 있어 왕족, 문인, 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고 동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世居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심양에 갔을 때, 함께 잡혀온 나인(娜人) 홍덕(弘德)이가 봉림대군에게 날마다 김치를 담가서 드렸고, 조선에 돌아와서도 임금이 된 효종에게 김치를 갖다 바치니, 효종이 감탄하여 낙산 기슭에 있는 밭을 홍덕에게 주었답니다. 이 밭을 홍덕이 밭(弘德田)이라고 하며 지금도 낙산 기슭에 조그맣게 남아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밀사(密使)로 파견된 이상설(李相卨)의 별장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들어섰고, 해방정국에는 이승만(李承晩)이 이화정 옛 터에 이화장(梨花莊)이란 이름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쌍계동천은 두 물줄기가 흐른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한 줄기는 경신고등학교 어름에서 흘러내려 성균관 옆을 지나 반촌을 지나고 다른 한줄기는 혜화문 부근에서 흘러내려 지금의 대학로로 지나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드는데 지금은 모두 복개(覆蓋)되어 물줄기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낙산 정상에서 한양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한 지맥(支脈)이 뻗어가서 숭인동과 보문동 사이에 봉우리 하나를 만들었는데 이를 동망봉(東望峰)이라 하며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갔을 때 단종비(端宗妃) 송씨가 인근에 있는 청룡사(靑龍寺)에 살면서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동쪽의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낙산의 끝자락에는 한양의 사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였던 동학(東學)이 있었으며 그 주변에 북평관(北平館)을 지어 여진족 사신들이 묵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과거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있었던 곳 부근입니다. 조선시대의 외교정책(外交政策)은 사대선린(事大善隣)으로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북으로 여진족(女眞族)과 동으로 일본(日本)과 선린(善隣) 하였습니다.

이들 삼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머물 수 있도록 요즘의 대사관과 같은 관청을 두었는데 중국사신은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들어와 덕수궁 주변에 있었던 태평관(太平館)에서, 일본사신은 남소문인 광희문으로 들어와 지금의 인현동 목멱산 북쪽 자락에 있었던 동평관(東平館)에서, 여진족 사신은 동소문인 혜화문으로 들어와 낙산 끝자락에 있었던 북평관(北平館)에서 묵었다고 합니다.

좌청룡인 낙산이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그 지세(地勢)가 매우 허약하여 풍수지리적인 비보책(裨補策)을 많이 썼는데 첫째로 낙산의 지세를 연장하기 위해 흥인지문 옆에 청계천을 준설한 흙으로 가산(假山)을 쌓았고 한양의 사대문과 사소문의 글씨가 모두 세 글자인데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산맥을 연상케 하는 갈 지(之)자를 한자 더 추가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대문에는 볼 수 없는 옹성(甕城)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보책(裨補策)을 알고 있었던 일본은 침략 이후 가산(假山)을 쓸어버리고 그곳에 운동장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헐어 버린 운동장에 동대문역사공원과 디자인 센터가 들어서 있습니다.

동대문역사공원에서 눈여겨 볼 것은 복원된 성곽 터 아래 부분에 설치된 이간수문(二間水門)으로 목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중 도성 안에서 청계천에 유입되지 않고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두 개의 구멍을 낸 수문(水門)입니다. 흥인지문과 동대문 역사공원 사이로 청계천(淸溪川)이 흐르며 도성안의 다섯 물줄기인 백운동천, 옥류동천, 삼청동천, 쌍계동천, 청학동천의 모든 물들은 청계천으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가서 다섯 개의 홍예 모양으로 물길을 낸 수문인 오간수문(五間水門)을 통하여 도성을 빠져나갑니다.

동대문 역사공원을 지나면 남소문(南小門)인 광희문(光熙門)이 길 한편에 서 있는데 건국초기에 장충단 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남소문이 세워졌다가 그 효용성이 없어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광희문은 초기에는 남소문과 구별하여 한양의 물길이 지나가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가까이 있어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고 도성의 장례행렬이 서쪽은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지나갔으므로 광희문을 또 다른 이름으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광희문에 관련된 특이한 이야기는 인조(仁祖)가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공주(公州) 공산성(公山城)으로 도망갔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도망쳤는데 두 번 모두 광희문을 통하여 도성을 빠져 나갔다고 합니다. 동묘(東廟)는 중국의 유명한 장수인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인 관왕묘(關王廟)로서 동쪽에 있다고 동묘라 부르며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관우 장군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 명나라의 황제가 직접 비용과 현액을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동대문 밖에 동묘, 남대문 밖에 남묘(南廟)가 설치되었고 조선 말 고종 때 명륜동에 북묘(北廟), 서대문 천연동에 서묘(西廟 : 숭의묘)가 세워져 모두 네 곳에 있었으나 동묘와 남묘만 남았고 서묘와 북묘는 없어졌으며 남묘도 사당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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