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촌칼럼] 혁신적인 삶과 평범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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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촌칼럼]

혁신적인 삶과 평범한 일상.

 

글. 이래경 | 일촌공동체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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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절부터 온 삶을 바쳐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단체 활동으로 수십년을 함께 고생하던 지인이 이명박근혜 정부 탄생 이후 좌절과 실망 끝에 속세의 삶을 정리하고 입산하여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세의 연을 끊지 못하고 매주마다 자기성찰의 글을 보내 옵니다. 올 새해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일촌식구들과 함께 읽어보고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고자, 받은 글 그대로 옮깁니다.

QTE

우리는 삶을 하루 하루 지루하게 반복하는 건 아닐까요? ‘새로움의 개입’이 없는 삶은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설파했습니다. 개인의 삶도 그렇고, 나라의 정치도 그렇고 구태의연하고 지루한 반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움이 없는 삶이나 정치는 피로와 지체로 바로 죽음과 같습니다.

내 삶에서 새로움 없는 반복은 살았으나 무의미한 나날의 연속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내 한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이렇게 속되게 끝나 버립니다.

우리 정치에서 새로움 없는 반복과 지체는 이명박근혜를 낳았고 그 결과 국민들은 우롱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박근혜의 유치함과 추락에도 야당의 구태와 지리멸렬은 계속되고 있어 그 어디에도 정권교체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삶은 그렇지 않은지, 내가 쓰는 글은 반복이 되는 건 아닐까 늘 살펴 보고 있습니다.

[大學]에서도 그랬습니다.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 나날이 새롭게 살아야 한다고요. 욕조 세숫대야에다 이를 새겨놓고 매일 세수할 때 마다 들여다 보라고 했다죠. 日新(일신)이 뭐냐, 作新民(작신민)이라 민중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거죠.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한배움 길은 밝은 속알밝힘에 있으며 씨알사랑함에 있으며 된 데 머묾에 있나니라-함석헌옮김). 여기서도 親民을 新民으로 해석하기도 하거든요.

신학자 폴 틸리히는 ‘새로운 존재 ‘를 이야기 합니다. ‘궁극적 관심’이라는 ‘깊이’ 에 이르러야 ‘일시적인 관심’을 넘어 설 수 있으며 우리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바로 존재의 내재적 목적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얻는다는 거죠.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탄식을 넘어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궁극적 관심과 민중을 새롭게 하는 일로 양 날개를 달아야 할 것입니다 아, 새로운 존재 만이 너를 구원할 거야!

UNQTE.

답답한 현실을 탄식하는 지인의 절절함이 넘쳐나는 글입니다. 우선 몇가지 주석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위에 언급된 화이트헤드라는 분은 20세기 위대한 수학자의 한 분입니다. 현대수학의 기초를 닦았고 물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입니다. 동시에 뛰어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유기체 철학과 생성론 (not to be, but to become)”으로 현대철학의 새로운 시각을 넓혔습니다. 제 자신도 이 분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몇 권의 책을 사놓고는 아직 첫 장도 못 넘기고 있습니다.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日新又日新(하루하루를 새롭게)이라는 글귀는 공자님이 좌우명으로 삼을만큼 유명한 문구입니다. 중국고대의 주나라 시절, 황제의 욕조에 새겨 놓은 내용으로 공자님은 주나라 시절의 중국은 나라전체가 온통 혁신의 과정에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통상 동양고대사는 아시아적 봉건군주제에 갇혀 내부의 변화가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중국은 엄청난 격변과 혁신의 시대였습니다. 공자님 말년의 핵심과제는 학문과 군자론을 통해 作新民(백성들을 새롭게)하는 것이였습니다.

 

지인의 답답함을 한편 이해하면서 저는 그를 꾸짖고 비판하려 합니다. 우선 세상의 변화는 산속에 들어가서 한탄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이야기 한 법정스님도 계시지만 (현대인의 탐욕적 삶을 빗대어 무소유적 자세를 가르쳤다고 믿습니다만), 탐욕과 마찬가지로 무소유는 틀린 생각입니다. 현생의 우리 삶은 향유를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산속에서의 외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참여와 경험과 성찰과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한국불교유신론을 저술한 한용운 스님은 불교사찰이 있을 곳은 산중이 아니라 민중의 고통이 있는 저잣거리라고 일갈을 합니다. 제가 평소 하는 말입니다만 上求菩提 (상구보리, 하늘을 향해 구도를 하면서 깨달음을 얻다)보다 下化衆生 (하화중생, 이 땅에서 중생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다)가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접하는 현실, 한심한 정치권과 그들의 행태, 대중을 일방적으로 수탈하는 탐욕적인 사회경제체제, 무기력을 넘어서서 출세를 위해 巧言令色(교언영색)하는 지식인 사회 등 무엇 하나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등질 일이 아니라, 차리리 하늘을 원망할지언정 저잣거리에서, 일상의 삶속에서, 조그만 희망의 싹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동시에 변화는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구의 50억년 가까운 시간속에 이루어진 모든 진화와 변동 역시 매일 매일 떠오르는 태양과 더불어 일상속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거대한 변화도 지질학적인 기나긴 시간을 지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반복과 진퇴 그리고 적응를 거듭하면서 형성되어 진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새로움은 현실 또는 일상에서 떨어져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일상속에 내재되여 싹을 키워가고 있다고 봅니다. 뉴우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은 것도 일상의 성찰과 숙고속에서 이루어진 셈이죠. 새로움은 일상에서 발견되고 반복과 적응속에 가능성의 싹을 키워갑니다. 지루하고 무의미한 것은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일상속에서 살아가는 agency 자신의 삶의 관점과 자세일 뿐입니다. 공자님에게 日新(일신)은 갑작스레 이상한 것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관찰하여 온전히 이해하고 파악하는 과정의 작업이였습니다.

 

젊은시절 제게는 인생의 좌표였고 의형과 같았던 정치인 고 김근태씨의 어린 시절 경험이야기입니다. 교장 선생님이셨던 그의 아버님께서 하루저녁 고등어 몇마리를 사오셨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고등어를 구워먹는 날은 잔칫날 같은 날이였겠지요. 아버님은 침을 삼키는 자녀분들을 불러 모으시고, 우선 생물도감에서 고등어편을 찾아 모두 숙지하도록 한 후, 굽기 전의 고등어를 요리조리 모두 살피고 눈알과 몸체의 색감,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는 느낌을 체험하게 한 후, 연탄불에 굽는 과정을 지켜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비로소 밥상에 올라 혀끝으로 맛을 느끼게 했답니다. 그래야 비로소 고등어 대해 대충은 안다고 말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답니다. 참으로 대단한 선생님을 아버지로 모신 덕분에 김근태 같은 훌륭한 인물이 있었겠지요.

위의 이야기는 일상에 흔한 고등어 한마리를 체험하고 알아가는 앎의 과정이지요. 그런데 상기의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우리가 온전히 고등어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선 고등어가 바다속 알에서 태어나 성장하다가 어부에게 잡혀 아버님께 팔릴 때 까지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인간에게 허용된 감각기관과 인지능력으로만 파악한다는 것이죠. 인간의 감각과 인지능력 밖의 고등어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한 평생을 다 바쳐도 한마리의 고등어를 온전히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인간의 감각과 인지능력으론 불가능한 것입니다. 보다 많이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지요. 따라서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평범속에서도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고 성찰하고 탐구하고 이해해가는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다만 사물에 대해서만 아니라, 살아가며 겪는 수많은 체험, 사건과 타자와 만남속에서 무수히 진행되는 것이죠. 지루하고 무기력한 것은 오로지 agency 자신이 갖는 한계일 뿐입니다.

혁신과 일상은 별개의 주제와 사건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여 있는 것이 아닌지요? 우리의 모든 일상사 역시 서로가 연결되여 영향을 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때로는 서서히 때로는 격렬히 반응하면서 변화해 갑니다. 요체는 일상에 매몰되여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소모하거나, 조급하게 변화를 추구한다면서 평범한 일상속에 있는 변혁의 싹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에 있다 할 것입니다. 사계절의 변화는 다급하게 이루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겨울 같은 꽃샘추위를 겪으면서도 미풍의 예감을 동반하고, 한여름의 찌는 더위속에서도 가을의 결실을 준비합니다. 저는 세상일이 답답하면 왁자지껄한 전통시장의 번잡한 사람들 속에 묻혀 생각을 멈추고 걸어가 보거나, 지하철을 타고 무심하게 동승한 승객들의 표정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 중에 나와 우리들 삶의 이야기와 다가올 또 다른 일상을 발견해 봅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라는 시에 마지막 귀절로 글을 마칩니다.

“ 바람이 분다, 자 살아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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