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의 ‘새’공동체 이야기] 기억보다 더 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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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보다 더 깊은

“너무 아파가지고 어떤 때는 밤에 심장을 막 후벼 파는 것 같습니다. 그거 아시죠?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진해지는 거라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보고 싶고 그리움은 더 진해 집디다. 기억은 희미해질지언정 그 보고픔은 더 진해지는 거예요. 이제 1년도 안됐는데 너무 힘듭니다.”

며칠 전 언론에 소개된 세월호 ‘아빠’의 이야기입니다. ‘아빠’는 다른 유족들처럼 죽은 딸을 위해 새 휴대전화를 장만했습니다. “아이의 핸드폰 번호를 못 죽였습니다. 애한테 가끔가다 카카오톡 이런데다 한 번 씩 편지를 씁니다. ‘잘 지내고 있지’ 이렇게… 우리 애 핸드폰은 항상 충전기에 꽂힌 채 24시간 켜있습니다. 그러면 중학교 친구 애들이 딸 핸드폰에 카카오톡을 해 와요. 어쩔 때는 밤에 계속 딸 핸드폰이 울어요. 카톡, 카톡 그러면서… 보니까 우리 애 중학교 단짝인 애가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계속 쓰고 있더군요.”

“카톡카톡”, 카톡 소리에 깨어나는 세월호 아빠의 이야기가 가슴을 때립니다. 유족들 대부분은 아직 아이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한스럽고, 안타깝고, 또 너무도 사랑하여 아직 아이의 자취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잊지 않을게’라는 노래 제목처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세월호의 영혼들이 외롭지 않게 말입니다.

세월호 참사 1주년 우리는 이미 ‘4.16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잊지 않음으로써 하나가 됩니다. ‘기억의 공동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세월호의 죽음을 그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기억’이 절실합니다. “인종도 언어도 종교도 나이도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야말로 진실로 나와 유관하다”

『아무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바다출판사, 2013)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저자 알폰소 링기스는 ‘죽음의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기억하는 공동체입니다. 지배적 질서의 바깥 타자화된 죽음을 잊지 않고 공감하는 공동체입니다. 돈도 권력도 언론도 외면하는 이른 새벽 노숙자의 죽음과 깊은 산속 요양병원의 죽음에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공동체입니다.

죽음의 공동체는 이해관계와는 거리가 먼 절대 실존의 공동체입니다. 아니 실존 그 이상입니다. 머리의 기억 보다 깊은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때 죽음을 기억하는 공동체란 사건, 사고에 대한 표피적인 기억이 아닙니다. 기억이 일종의 ‘되살아난 생각’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존재론적 각성입니다. 이를테면 ‘숨겨진 하나됨’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참혹한 고통이 있을 때에만 ‘숨겨진 하나됨’이라는 깊은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발가락 끝에 가시가 박혔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발가락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배탈이 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위장과 내가 하나였음을 자각합니다. 나의 몸이지만, 아프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아픔을 통해 본래 하나였음을 자각한 것입니다. 사회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라면,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 몸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원고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라는 배의 존재도, 선장과 선원도, 해양수산부와 해경의 실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링기스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타자가 혼자 죽어가지 않도록 타자를 위로한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공동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사실은 타자라고 생각되었던 그 역시 타자가 아니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곧 나였다는 것을.” 세월호의 공포, 세월호의 눈물, 세월호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엔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이미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아픔 때문에 되살아난 것뿐입니다.

공동체를 혹 ‘얕은 공동체’와 ‘깊은 공동체’로 나눌 수 있다면, 아픔을 나누는 공동체, 죽음을 기억하는 공동체야말로 ‘깊은 공동체(deep community)’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영혼(靈魂)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아니 ‘영혼의 공동체’입니다. ‘동심(同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共同體)의 그 ‘동(同)’, 모든 사람 안에 내재하는 ‘같은 마음’ 말입니다. ‘공동체 영성(spirituality of community)’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그것은 공동체 감정(community sentiment), 공동체 의식(community spirit)보다 깊은 그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세월호 아이들의 카톡소리가 귓가를 울립니다. 동학의 13자 주문이 생각납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万事知).’ 그 중에서도 ‘영세불망’을 떠올립니다. 종교적 주문이니 기계적으로 해석을 할 수는 없지만, 말 그대로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근본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됨, 숨겨진 하나됨 말입니다.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였음 잊지 말고 잊지 말자는 다짐입니다. “동심의 재발견, 혹은 동심의 회복.” 이제야 가슴이 아픈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대가 나’였기 때문입니다.

글. 주요섭 |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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