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의 ‘새’공동체 이야기] 미생의 공동체 완생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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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의 ‘새’ 공동체 이야기]

미생의 공동체 완생의 공동체

 

지난 해 ‘미생’이라는 TV드라마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여운이 길게 남아있습니다. 최소한 ‘장그래’라는 주인공의 이름만은 꽤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습니다. ‘장그래’는 이제 비정규직을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저희 집엔 TV가 없어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여행을 갔다 우연히 보게 된 미생의 스토리나 연기가 과연 실감이 납니다. 사실은 오래 전 만화로 보았으나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뒤늦게나마 드라마를 보며 ‘장그래’와 ‘이차장’으로 대표되는 회사인간의 인생이 참으로 절절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는 ‘미생’이라는 말. 인터넷 바둑을 즐기는 애호가로써 ‘미생’의 숨은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미생(未生), “태어나긴 했으나 아직 성체(成體)로써는 미완인 존재.”

미생은 바둑판이라는 한 우주에서 실존적으로 불안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살아있으되 삶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또 버텨야 합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미생은 전쟁 같은 인생에서 적들의 먹이감입니다. 미생은 예고된 죽음이기도 합니다. 미생은 치명적 패배를 암시합니다. 때문에 목표는 ‘완생(完生)’입니다. 두 집을 내고 삶의 안전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멈춰서 곰곰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바둑판 전체로 보면 완생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완생은 미생이 그렇듯이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과정입니다. 실제 완생 하고도 전체 바둑에서 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더욱이 여기엔 한 가지 대전제가 있습니다. 바둑판은 19줄×19줄의 폐쇄된 세계이며, 361개의 눈에만 바둑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둑판은 이를테면 폐쇄적 공간, 닫힌 우주입니다. 요컨대 미생이든 완생이든 바둑판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물음표는 바로 이것입니다.

삶은, 사회는, 공동체는 닫혀있는가 열려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생명세계는 열려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있습니다. 세포막이나 개체적 존재나 생사(生死/태어나고 죽음)로 닫혀있지만, 동시에 호흡과 유기적 관계와 창조적 순환으로 열려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생성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바둑판에서 미생은 안정적 삶을 보장하지 못한 것이고, 완생함으로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진실은 ‘미생이기에 살아있는 것 아닐까요? 완생한다고 끝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것은 바둑판 너머를 상상하는 일입니다. 삶이 바둑판 안에 갇혀있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19줄×19줄의 바둑판의 경계를 넘어서야 미생과 완생 너머 ‘영생(?)’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미생을 보며 공동체의 생애를 생각해봅니다. 그 많던 의도적 공동체의 사활은 어떻게 되었을까. 삶을 나누는 관계망들은 어떻게 변화해갔을까. ‘미생의 공동체’와 ‘완생의 공동체’라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좁은 의미의 공동체건 넓은 의미의 공동체건 수없이 많은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또 사라집니다. 공동체 그 자체가 실존입니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합니다. 수많은 공동체들이 미생으로 남아있습니다.

미생의 공동체는 이를테면 ‘동사적 공동체’입니다. 존재가 생성 그 자체인 무한히 열린 공동체입니다.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이렇습니다. 명사로써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공동체를 딱딱하게 고정된 실체인 ‘명사’가 아니라 생성하는 ‘동사(動詞)’로 잃어봅니다. 공동체는 이를테면, “함께(共) 하나(同=公)를 이룸(體)”입니다. 특히 구성원을 관통하는 ‘숨겨진 하나됨’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공동체는 ‘명사적 공동체’가 아니라 ‘동사적 공동체’입니다. 완생의 공동체보다 미생의 공동체에 가깝습니다. 완생이 닫힌 유토피아라면, 미생은 열린 유토피아입니다.

‘과정기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조기획’이 목표와 설계도에 따른 공학적 구조물 만들기라면, 과정기획은 창조의 과정 그 자체입니다. 그 과정은 “자유로이 상호작용하고 그들 스스로 진화 구조들의 질서를 찾도록” 하는 촉매가 됩니다. 공동체건축하기(community-building)가 아니라, ‘공동체살리기’ 혹은 ‘공동체기르기’라고 생각하면 좀 달라질 지도 모릅니다. 공학적 은유가 아니라 생물학적 은유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역설적으로 미생의 공동체가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생명세계에 완생의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생의 공동체는 이를테면, 닫힌 유토피아입니다. 과거의 이념형 공동체나 폐쇄적 공동체가 그것입니다. 영원히 생성하는 미생의 공동체가 지금여기의 열린 유토피아일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2014년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무소유공동체 산안마을이 30주년 되는 해였습니다. 마음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기는 했지만 특별한 행사를 치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5년 31년째가 되었습니다. 산안마을 역시 완생했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들은 행복해보입니다. 미생이지만 행복합니다. 올해 4월이면 손자세대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분들의 철학이나 방향, 방식을 떠나서, 미생의 공동체 산안마을은 완생하지 않음으로써 영생의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공동체는 ‘미생’으로써 희망이 됩니다.

새 공동체는 열린 공동체이며, 생성하는 공동체이며, 과정기획의 공동체입니다. 동사적 공동체입니다. ‘함께 어울려 하나가 되어감’으로써 지금여기의 유토피아가 됩니다. 완생 자체가 목표가 아닌, 지금 여기서 행복한 미생을 상상합니다.

글.  주요섭 |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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