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의 ‘새’공동체 이야기] 전환,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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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 무엇을 할 것인가?

 글. 주요섭 |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전환의 비전은 ‘신인간(new human)의 출현’과 ‘신세계(new world)의 창조’다.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나기와 그에 걸맞은 사회경제 시스템의 생성이다. 신인간 없이 신세계 없고, 신세계 없이 신인간 없다. 물론 그 주인공은 신인간이다. 그리고 신세계는 마치 조물주가 그러했듯이 신인간이 창조하는 다시개벽의 새 문명이다.

혁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간도 신세계도 여전히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나와 우리를 설레게 하지 못한다.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마을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신인간과 신세계’가 도대체 어떻단 말인가? 이렇게 작디작은 비주류의 소수파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환의 기획’을 이야기하는 21세기 오늘에도 20세기의 혁명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혁명의 이념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전복적 사회변혁은 그 당시 지구촌 수많은 지식인들의 가슴을 대지진처럼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의 소수파들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권위와 권력의 진공상태, 러시아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성공조건은 여기에 있었던 듯하다. 양적 확대로 세상을 변혁하는 사회운동이나 정치혁명은 없다. 혁명은 사회·경제· 문화적 대변동의 혼돈/진공상태에서 비온 뒤 대나무순처럼 새로운 질서가 순식간에 돋아나는 하나의 사태다. 러시아혁명의 경우엔 1차 세계대전의 진공상태가, 중국혁명의 경우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진공상태가 소수의 혁명세력이 새로운 질서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120년 전 갑오동학혁명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청나라의 세력약화와 서구열강 및 일본의 침략 속에서 조선의 사회적 권위와 지배력이 급속히 이완되었고, 이 틈새에서 동학이 만들어가는 ‘접(接)’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는 민초들에게 희망의 새 세상이 되었다. 요컨대 혁명이건 전환이건 사회적 대변혁은 양적 확대를 거듭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돈/진공의 특별한 조건 속에서 소수의 새로운 존재와 시스템이 폭발적인 자기조직화로 확산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전환, 새로운 존재의 출현

결국 문제는 소수냐 다수냐가 아니라, 호랑이 등을 타고 가는 주체의 질적 차이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진공상태는 분명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의 성공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중국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없었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정치사회적 생태계는 숲의 천이와 같은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볼셰비키와 중국공산당은 소나무 숲의 도토리와 같은 새로운 종(種)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존재의 출현(emergence)’, 이것이야말로 전환의 대전제다. 근대 서유럽 산업혁명기에는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주체와 ‘팔기 위한 생산’과 같은 새로운 시스템이 존재했다. 새로운 존재만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다. 천지인 삼재의 ‘묘합(妙合)’이라고나 할까. 이미 우리사회는 진공상태인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교회도, 사찰도, 학교도, 노동조합도, 정당도, 정부도, 기업도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존재의 이유가 퇴색되고 있다. 탈학교, 탈정당, 탈종교, 탈도시가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확인할 것은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다. 더 좋은 활동이 아니라, 확실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존재를 찾아야 한다. 아니 스스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환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환골탈태이며 거듭나기(transformation)이다.

새로운 존재는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 곁에서 태어나고 있다. ‘가르침 없이 깨달은’ 수많은 우리시대의 성인과 진인들이 속출하고 있다. ‘신종(新種) 인류’와 ‘신종 문화’와 ‘신종 시스템’이 미세하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생성되고 있다. 기존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귀를 열고 눈을 열면,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 새로운 관계의 롤모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열망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렇게는 아니다’라고 자각한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새로운 그 무엇에 접속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전환, 초대하고 연결하고 행동하다

때가 되었다. 초대하고 연결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마당, 그물,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초대하고 연결하고 행동하는 새로운 주체들 사이사이에서 창조된다.

다시 조안나 메이시의 ‘산파’를 떠올린다.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돕는 산파의 몫과 거기에서 배양되고 자라난 새로운 존재들의 활력에 주목할 일이다. 나비를 열망하는 ‘상상하는 세포(imaginal cell)’을 찾고 격려하고 또 길러야 한다. ‘전환 운동가/활동가‘를 모시고 기르고 살려야 한다. ’깨어있는 활동가(conscious activist)‘ 혹은 ’영적 활동가(spiritual activist)‘를 깨워야 한다. 그들의 사회적 응답과 새로운 방식의 실천을 도와야 한다.

신종 효모균을 배양하는 배양소를 떠올릴 수도 있다. 활동가 양성소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때 양성은 ‘양성(養成)’이 아니라 ‘양성(釀成)’이다. 다른 존재되기이다. 물과 밥을 술이라는 다른 존재로 만드는 누룩처럼 말이다.

‘민주적인 시민’에서 ‘깨어있는 시민’으로! 새로운 존재로의 질적 변화를 위한 ‘전환워크숍’을 상상해본다. ‘전환워크숍’에 참여한 그는 이제 ‘깨어있는 시민’이 된다. 그의 불안과 두려움은 이제 새로운 삶과 사회를 위한 자극제와 촉매제가 된다. 그리고 또 다른 깨어있는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생성한다. 이를테면 ‘전환의 시민운동’이다. 지금 여기 스스로 만들어가는 생활 속의 유토피아다. 새로운 공동체운동이다.

120년전 동학의 그들처럼 스스로 우리시대의 접주가 되어 마을마다 마음공부와 생활나눔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전환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마당을 만들어 초대하고, 외톨이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고, 열망의 표현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열망. 우리에겐 전환의 사상도 있고 전환의 비전도 있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발아하는 전환시민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행동이다. 열망을 분출시키는 ‘열정’,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드는 ‘낭만’,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이상’이 절실하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아니 일주일에 한번 아니라, 하루에 한 번, 치열한 ‘만남’이 절실하다. 전환은 이미 진행형이다. 이제 스스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초대하고 연결하고 행동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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