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섭의 ‘새’ 공동체 이야기] 왜 결사체가 아니고 공동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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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요섭 |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최근 지적 장애인 언니를 홀로 보살펴오던 여동생이 “할 만큼 했으나 이제 지쳤다”는 말을 남기고 고단한 삶을 스스로 마감해 사람들을 몹시도 아프게 했습니다. 지난 해 2월 이른바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또 한 번의 큰 슬픔이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은 지난 해 2월 서울시 송파구에 사는 세 모녀가 큰딸의 만성 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말 죄송합니다” 라는 메모와 함께 전 재산인 현금 70만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놔두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사건입니다.(지난 1월 초에는 서초구에서 중산층의 남성 가장이 세 모녀를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이 사회에서 지치고 죄송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왜 여동생과 세 모녀는 동사무소나 복지관에 좀 더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왜 교회나 성당 혹은 절을 찾지 않았을까, 왜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사람은 세 모녀가 국가의 긴급복지지원제도를 몰랐을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알았다 하더라도 결론은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원인은 고단한 삶 그 자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지치고 힘들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요.

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을까? ‘존엄’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생명의 존엄, 인격의 존엄, 영혼의 존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상, 존엄은 ‘또 다른 존엄’에 의해 함께 지켜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 무심합니다. 함께 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과 인격과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이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 이야기입니다. 함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상품이 아닌 선물을 주고받을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힘들 땐 한 몸이 되고, 기쁠 땐 한 마음이 되고, 삶 속에서 ‘함께 하나를 이루어 갈’ 공동체 말입니다.

요새는 정치권에서도 공동체의 붕괴를 걱정합니다.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파편처럼 찢겨졌다는 말입니다. 의지할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삶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공동체의 붕괴란 사회적 신뢰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어디에도 믿을 데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 모녀나 동생처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삶은 이미 ‘생존’의 문제가 아니고, ‘존엄’의 문제이며 ‘관계’의 문제입니다. 구호(救護) 보다 치유(healing)가, 웰페어(welfare)가 보다 웰빙(wellbeing)이, 결사체가 보다 공동체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국가는 미국의 사회학자 맥키버(McIver)의 말대로 공동체(community)가 아니라 결사체(association)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조건으로 국민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니까요. 맥키버에 따르면 ‘결사체란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유형’입니다. 계급·카스트(caste)·기업체·국가·학교·클럽·경기단체·학회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결사체는 삶의 전체를 나누지 않습니다. 생활의 특정한 부분만 결합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특정한 목적의 달성이 중요합니다.

2012년 어느 날 갑자기 ‘자활공동체’가 ‘자활기업’으로 이름이 바뀌었던 시절이 기억납니다. 자활공동체는 자활지원센터가 만들어준 ‘인위적 결합’이었지만 목표가 달랐습니다. 생활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잘 먹고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 ‘공동체’였습니다. 경제가 중심이지만,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정부가 정한 행정명령에 따라 자활공동체란 이름이 자활기업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인격적 관계와 배려의 마음은 사라지고 ‘순수한’(?) 경제적 관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목적 달성을 위해 매진하지 않으면 탈락할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결사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조직은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한살림은 원래 협동 ‘조합’이 아니었습니다. 한살림은 처음부터 공동체운동을 지향했습니다. ‘협동공동체’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적절합니다. ‘한살림’이란 말 자체가 ‘함께 살림’ 즉, 공동체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협동조합’이 아닌 ‘협동공동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 법인격이 뭐가 되든지 말입니다.(조합(組合)이란 한자말도 별로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편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계약이 ‘보이는 결합’이라면 ‘보이지 않는 결합’도 있을 것입니다. 계약에는 ‘필요의 충족’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만, 그것만일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이익이나 목적만은 아닐 것입니다. 합의와 계약 이전에 서로를 관통하는 ‘숨겨진 하나됨’의 존재를 생각해봅니다.

‘새’ 공동체를 그려봅니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공동체는 결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입니다. 전통적 공동체에서는 ‘드러난 하나됨’을 빌미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묶어 두었습니다. 전통적인 공동체는 구속의 공동체였습니다. 이제 ‘하나됨’을 인정하면서도 존재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근대세계는 ‘나’ 없는 공동체에서 벗어나, 계약에 의한 새로운 관계형식으로써 어소시에이션을 만들었습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그것입니다. 19세기에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또 한 번의 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오늘 새로운 사회적 점프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를 살리는 공동체, 내가 온전히 실현되는 공동체 말입니다. 더욱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새로운 공동체 뿐 아니라, 기존의 공동체와 결사체가 함께 공존하고, 또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엄밀한 이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합니다. ‘스토리’를 만들어가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관계, 혹은 새로운 공동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부분적 결합과 전면적 결합, 이익과 의미, ‘계산 있는 협동’과 ‘계산 없는 협동’이 역동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공동체 이야기 말입니다. ‘자연적 결합’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인위적 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개인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계약으로 ‘숨겨진 하나됨’을 실현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야기 말입니다.

사진. 주요섭 |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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