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시민] 물질만이 아니라 정서와 이성의 복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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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만이 아니라 정서와 이성의 복지도 함께

 

인간의 가장 큰 질문이면서 또 너무나 큰 질문이어서 좀처럼 생각하기를 꺼리는 질문 하나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듣기 좋으라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동물학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인간의 제대로 된 ‘안녕’ – 영어로 따지면 이 말은 ‘복지’라는 말과 같은 “welfare”이다 – 은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갈 때에 비로소 성취된다.

이 질문은 보통 그와 똑같이 부담스러운 질문, ‘인간의 영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붙어 있다. 고대 그리스 초기의 철학자들은 아주 물질적인 방식으로 이 질문에 접근했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여러 근육을 움직이고 또 바깥에서 들어오는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영혼이라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그와 정반대로 지극히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영혼을 정의하였다. 태어나서 죽으면 없어져 버리는 우리의 육신과는 전혀 동떨어진 불멸의 존재로서, 우리의 진정한 본질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서 영혼을 본 것이었다. 플라톤의 제자였지만 여러 모로 스승에 대한 ‘안티’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자의 편향을 모두 극복한 독특한 영혼론을 전개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의 유명한 통찰 또한 이러한 그의 영혼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의 모든 학문에 능통한 만능선수였지만, 무엇보다도 동물학자로서의 능력이 출중하였던 이로 알려져 있다. 인간 영혼에 대한 그의 접근 또한 인간에 대한 생태학적 관찰과 다른 동물과의 비교라는 동물학의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 먼저 그는 스승 플라톤처럼 인간의 영혼을 육신과 완전히 유리된 무엇으로 보는 관점을 버리고, 인간 육체의 작동 메커니즘과의 관계 속에서 해명하는 관점을 취한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정말로 단순히 근육과 감각 기관의 작동 메커니즘에 불과한 것이라고만 말해 버리면 다른 동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에 대한 해명이 양자의 문제점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근육과 감각 기관의 작동 메커니즘이 다른 동물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해명하는 것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의 주저 [영혼에 관하여(De Anima)]의 내용을 이룬다.

책의 내용은 복잡하고 어렵다. 이를 충실하게 요약 해설하는 과업은 다른 이에게 미루고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영감삼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의 흐름을 주욱 쫓아가보자. 여러 동물들의 감각 기관과 근육과 내장과 생태를 살펴보면 한 마디로 완벽한 전체를 이루고 있다. 치타나 꿀벌이 살아가는 방식과 그것들의 몸의 구조와 행태의 패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신체 구조, 행동 양태, 삶의 방식, 감각 기관의 구조 등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 당혹하게 된다. 이른바 ‘개인주의’라는 신화가 완전히 박살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인간 하나를 그대로 자연에 내동댕이 쳐놓는다고 하자.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마도 그(녀)는 1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는 두드러진 능력이 내장되어 있지도 않다. 감각 기관은 쓸데없는 것들이 과도하게 발전되어 있는 반면 사냥이나 피신에 적합한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면 이러한 자연적 구조와는 터무니없이 동떨어진 욕망과 동기로 삶을 영위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동물이 어떻게 삶을 영위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그(녀)의 근육 및 감각 기관과 어떻게 연결되어 전체를 이루는지는 겉으로 드러난 신체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인간의 영혼을 육체로만 환원할 수 없게 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장치는 무엇을 중심으로 작동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장기이다. 바로 마음과 머리 즉 가슴에 깃든 감정 그리고 머리에 깃든 이성 – 혹은 영성 – 이다. 이 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도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히’ 생리적인 즉 육체에 고유하게 깃든 욕망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을 움직이고 살아있게 만드는 동기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동기는 오직 마음이 동해야만 하며, 그 마음은 머리의 이성의 허락을 받아야만 전면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그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로 자리잡는다. 요컨대, 인간이라는 동물은 가슴과 머리로 움직이는 동물이다. 이것이 동서를 통틀어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었던 듯하다.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은 인간 장기의 해부학을 담고 있지만, 여기에는 눈으로 손으로 관찰할 수 있는 5장5부 이외에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장기인 심포(心包)와 삼초(三焦)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5장5부의 장기를 서로 연결시키고 함께 조화되도록 하는 궁극의 생명력을 바로 이 심포와 삼초에서 찾고 있거니와, 심포는 다름아닌 ‘심뽀’ 즉 마음 씀씀이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인간 영혼의 이 독특한 동물학은 곧바로 사회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마음과 머리라는 장치는 타인들과의 관계 및 대화 즉 사회 혹은 공동체가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쉬운 예로 말하자면, 마음과 머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와 소통하기 위한 안테나요,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정서와 지식과 정보에 접속하기 위한 무선 장치인 것이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개인의 마음과 머리도 진정한 인간 영혼의 본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이 삶을 함께 공유하는 전체 사회 혹은 공동체의 마음과 머리인 것이다. 이제 어째서 그가 말한 ‘사회적 동물’이라는 유명한 말이 어째서 동물학적 통찰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벌은 군집을 이루어 벌집을 이루고 산다. 고래는 떼를 이루어 바닷속을 이동하며 산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사회 전체의 마음과 머리를 이루어야 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정서와 지식과 이성을 스스로의 마음과 머리에 담아놓을 때에 비로소 팔 다리와 감각 기관들이 열리게 되는 독특한 동물인 것이다.

복지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수급자들 중에는 정말 시셋말로 심하게 ‘망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적잖이 만나게 된다. 술과 약에 취해 있는 경우도 많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다른 인간 및 사회와 관계를 맺을 능력이 거의 소진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다. 보수적인 이들 중에는 바로 이것을 들어 복지가 인간을 망가뜨린다는 논거로 삼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인간의 행태와 복지 두 가지 사이의 인과 관계를 바로 논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간에 결정적인 매개항이라고 할 ‘사회’라는 것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정한 복지 혹은 안녕을 찾고 인간으로서의 행동 패턴을 갖추게 되는 것은 오로지 온전히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 공동체의 정서와 이성에 접속할 때이다. 하지만 빈곤과 배제 및 소외 등의 원인으로 그러한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정서와 이성이 마비되고, 인간 존재의 중추인 머리와 가슴이 메말라가면서 몸과 욕망의 패턴도 어지러워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여기에서 그 사람에게 다시 사람 본래의 형상을 되찾아 주기 위해 복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지는 단순히 그 사람의 생리적 물질적 안녕을 돌보는 것 뿐 아니라, 다시 자신감을 가지고 사회 전체의 정서와 이성에 접속할 수 있도록 즉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더욱 전면적인 복지의 관념을 확장하는 대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서 ‘복지 때문에 사람이 망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인간에 대한 잘못된 통찰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식의 복지가 정말로 가능하겠느냐고 회의를 품는 이가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를 읽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더 쉽고 빠른 방법이 있다. 내 옆의 사람 아니 나 자신의 신체와 정서의 구조를 가만히 살펴보라. 우리 모두는 마음이 있고 머리가 있으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삶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인간은 누구나 그 신체에 접속 장치를 내장하고 태어나는 스마트폰이다. 접속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중간에 끊어졌을 뿐. 이렇게 물질적인 안녕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다시 구축하고 능동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시민의, 사회적 시민에 의한, 사회적 시민을 위한’ 복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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