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시민] 복지국가에서 복지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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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에서 복지사회로: 사회적 경제의 중요성

 

글.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오는 회의적 대답의 하나는 ‘대한민국 국가가 과연 그렇게 될까’라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우선 몇 몇 복지 정책의 강화 정도가 아니라 보다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복지 시스템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대단한 역량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큰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 그런데 특히 세월호 사건을 거친 이후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국가가 그렇게 큰 역량이 있다고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대단히 부패한 집단들이 설치는 복마전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 요즘 설문 조사를 해보면, 제대로 된 복지 서비스가 돌아오기만 하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국가에서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처럼 국가의 역량과 투명성에 대한 신뢰가 낮은 곳에서 그러한 합의가 쉽게 만들어질 리가 없다. 그리하여 낮은 세금 – 국가의 복지 활동 저조 – 신뢰 조성 실패 – 낮은 세금이라는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

지역에 가보면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경우가 많다. 어느 지역이라 할 것 없이 그 지역의 이른바 ‘복지 귀족들’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지방자치체를 통해 나오는 사회 복지 관련 예산들은 어김없이 그것의 배분을 꽁꽁 둘러싼 ‘사람의 장막’에 갇히기 마련이다. 종교계 인사들, 지역 유지들, 사회복지 관련 학과의 대학 교수들, 공무원들 등으로 이루어진 토착의 인맥이 그 예산 지출의 방향과 내용을 그대로 결정해버리는 폐해가 쉬이 청산되지 않는다. 지역에서나 중앙 정부 차원에서나 복지 행정 주체에 대한 사회적인 신뢰는 높지 않다.

어떻게 하면 이 악순환 구조를 깰 수 있을까? 나는 ‘복지국가에서 복지사회로’라는 구호가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지 정책은 분명히 19세기부터 국가가 행하는 재분배 정책으로 시작되었고 또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그러한 성격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이에 대한 비판은 20세기 말엽 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쏟아져 나왔었다. 복지국가가 지나친 세금과 가부장적 온정주의로 투자가들의 투자 의욕과 노동자들의 근로 의욕을 모두 빼앗아가며 장기적으로 경제 침체와 재정 악화만 낳게 되어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우파 쪽에서의 비판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신)좌파 쪽에서 나왔던 비판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잊어버린 듯하다. 이른바 ‘생활 세계의 식민화’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이들의 비판은, 복지국가가 개개인들의 생활과 사회 영역에까지 밀고 들어와 관료적인 논리와 방법으로 사회를 구획해버리고 사람들의 삶을 그 안에서 길들이고 통치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의 경제적 필요를 미끼로 삼아 국가가 과도하게 사방에서 설치고 다니는 일이 정당화된다는 비판이었다.

이 두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방 국가에서 복지국가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북유럽 국가 등 이른바 복지국가 선진국에서는 이러한 비판들을 많은 부분 받아들여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해가고 있기도 하다. 우파 쪽의 경제적 논리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미 1950년대부터 충분히 고려하였던 문제이기에 북유럽 모델의 설계 자체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들과 가능성들이 이미 내재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하지만 좌파 쪽에서의 비판은 상당히 북유럽에서도 70년대 이후 상당히 뼈아프게 다가왔던 문제였다. 복지를 줄테니 노동 생산성을 올려야 한다면서 모든 이들의 인생을 노동과 납세의 주기로 거의 채우다시피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또 국가가 행하는 복지가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으며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유의 문제는 없는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90년대 말부터 이러한 고민 속에서 ‘복지 사회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기존의 복지국가 모델은 국가가 재분배 정책을 통하여 일정한 재원을 마련하면 이를 바탕으로 복지 서비스를 직접 공공 영역에서 현물로 제공하든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고 민간의 복지 서비스 공급자들로부터 구매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빠져 있는 변수는 ‘사회’이다. 이 사회라고 할 영역에는 공공 부문으로도 또 민간 기업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사람들의 보다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사람들의 생산자로서 또 소비자로서의 능력과 욕구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사회적 경제’의 영역이 존재한다. 잘 알려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같은 것들도 있고, 그밖에 각종 직업 조합이라든가 자활 공동체 또 종교 관련의 모임 등과 같이 자발적 결사체이면서 경제 활동의 성격을 갖고 있는 모임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는 방금 말했듯이 사람들의 신뢰와 보다 인격적인 관계 형성을 통하여 살림살이의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곳으로, 특히 복지 서비스와 잠재적으로 그 영역이 대단히 크게 일치한다. 어린이집은 민간도 있고 공립도 있지만, 부모 협동조합에 근거한 공동 육아 어린이집도 있다. 그리고 참여한 이들은 이 세 번째가 앞의 두 가지에 비해 크게 만족도가 높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당연할 수 있는 이유는, 복지 서비스는 대부분 서비스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에 무엇보다도 신뢰와 관심이 그 질을 좌우하는 종류의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자본 수익률의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는 민간 기업이나 몰인격적인 관료적 논리로 작동하는 국가 영역이 항상 만족스러운 행위자가 되기 힘든 이유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복지국가의 틀을 이 사회적 경제와 연결시켜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쪽으로 전환하는 것은 어떨까? 이 복지국가와 사회적 경제의 결합 지금 북유럽 나라들을 필두로 하여 많은 유럽 나라에서 논의되고 또 시도되기 시작한 바이다. 복지 행정에 있어서 각종 협동 조합과 사회적 기업을 적극적인 파트너로 삼아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이 모델이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될 수 있다면, 대한민국 국가가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역량과 도덕성/투명성에 대한 낮은 신뢰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더 민주적으로 참여하여 투명하게 운영되는 사회적 경제의 여러 단위들이 복지 사업과 긴밀히 연결된다면, 국가에 대한 불신이 높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이들이 ‘인간의 얼굴을 한 복지’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를 매개로 하여 우리 사회가 정말로 복지의 확장이 절실하다는 것을 더 느낄 수 있을 터이니까. 이것이 초두에 말한 ‘복지국가에서 복지사회로’의 한 경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전제가 있다. 사회적 경제도 아직은 한국인들에게 낮선 것이며 따라서 분명한 신뢰가 뿌리박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에서의 복지 활동가 마을 활동가들이 더 적극적으로 이 사회적 경제 활동의 일원이 되는 것은 어떨까? 여러 생협에도 가입하여 지역주민들과 접촉면도 넓히고 또 마을과 지역의 사회적 기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다보면, 지역에서의 복지 확대와 서비스 향상이라는 목표와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게 될 것이다. 20세기의 복지국가는 주로 국가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위로부터’의 협상으로 주어진 것들이지만, 21세기의 복지사회는 이렇게 사람들과의 협동과 신뢰 속에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삶을 꾸려가고자 하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아래로부터’ 만들어 지는 것이리라.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는 ‘사회적 시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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