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시민] 복지와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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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사회적시민]

복지와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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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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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는 이제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논쟁은 항상 돈 액수의 문제, 즉 얼마를 조달하여 얼마를 쓸 것이냐에 집중되어 있다. 산업 사회가 공동체 전체라는 큰 규모로 재분배를 행한다는 것은 크고도 중대한 문제이며, 여기에는 숱한 쟁점과 고민해야 할 사안이 있건만 이렇게 돈 액수 문제에만 논의가 집중되다 보니 빠져나가고 방기되는 쟁점들이 숱하게 많다. 그 중의 하나가 권력의 문제이다.

무언가를 주고 받게 되면 거기에서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채권과 채무가 발생한다. 주는 쪽은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되며 받는 쪽은 물질적이든 도덕적이든 채무를 지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 문명의 태동기부터 어느 문명에나 있었던 아주 오래된 또 아주 뿌리깊은 감정이다. 사람이 서로 남는 것을 나누고 또 모자란 것을 받는 행위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이 오래된 감정이 개입하게 되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게 된다. ‘왜 주는데?’ 그리고 ‘왜 받는데?’ 또 ‘받은 쪽은 무얼로 갚을 건데?’ 등등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이렇게 주는 쪽과 받는 쪽의 권리와 의무를 따지는 버릇은 인류의 머릿 속에 깊이 박혀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언가를 주고 받으면서 생겨나는 위계 관계의 중첩은 마침내 거대한 권력 체계를 이루게 된다. 약 5천년 전에 성립한 왕정 국가는 왕과 신관을 정점으로 하여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받은 것 – 이는 ‘신의 가호’ 등과 같이 그 내용물이 아주 미심쩍은 것일 때가 많다 – 을 감사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그 댓가로 하잘 것 없는 무언가 – 이는 반대로 곡식과 온갖 물품 등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다 – 를 반대로 바쳐 올린다는 거대한 권력 체계를 형성하였다. 어쩌다 왕이 혹은 위계 서열 상층의 권력자가 ‘아랫 것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면, 거기에는 항상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받은 쪽은 자신이 이를 얼마나 자신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한편 그 고마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염없는 충성을 바치겠다는 뜻을 밝히는 한바탕 푸닥거리 의식을 벌여야 한다. 이렇게 윗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것은 항상 권력 서열이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졌으며, 그 권력 서열을 강화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산업 사회가 시작된 이후, 시장 경제에서의 1차 분배만으로는 인간과 사회의 안녕을 보장할 수 없고 그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졌으며, 산업 사회의 안정과 영속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대규모의 재분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고 이것이 제도로 안착되면서 20세기 중반 이후의 복지 국가가 출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복지 국가 출현의 논리적 맥락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아득한 청동기 시대로부터 인류의 무의식에 뿌리박은 ‘베풀어 줌의 권력 정치’의 심리가 한 순간에 사라질 리가 없다. 산업 사회에서 고도의 산업 생산력을 보장하기 위해서 또 파괴적인 경기 순환의 등락을 완화하고 사회의 안정과 현대화를 위해서 복지를 행하는 것임을 아무리 합리적으로 역설해도, ‘왜 베풀어 주는 건데?’ ‘받은 이들은 그 댓가로 뭘 할 건데?’ 등 우리가 태고적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심뽀의 질문들은 사람들 마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특히 이를 불편히 여기게 되는 집단은 이른바 지배 집단이다. 오늘날의 지구촌은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나라들로 거의 모두 이루어져 있지만, 그로 인해 사회의 권력을 쥐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집단이 완전히 사라진 나라는 아무 데도 없다. 이 지배 집단은 대부분 이러한 옛날의 심리가 강하게 남아있는 이들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이들이 복지 정책의 확장이나 이에 필요한 재정 확충을 반대하는 데에는 이들이 부담해야 할 몫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는 경제적 돈계산의 이유도 물론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적인’ 이유의 심층에는 앞서 설명한 태고적으로부터 내려온 심리 즉 무엇이건 없는 이들 혹은 ‘아랫 것들’에게 그냥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상당히 ‘비합리적인’ 심리가 작용하는 것도 분명하다. 지금 한국 사회의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하며 이를 시급하게 시정하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큰 위험이 닥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따라서 지금 더 많은 세금을 내어 사회적으로 복지를 확장하는 것이 더 많이 가진 이들 또 기득권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또한 장기적으로 이익이며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과 논리는 많이 있다. 또 지루한 논쟁 끝에 이러한 논리에 지배 집단의 많은 이들이 어쩔 수 없이 공감하게 되는 일도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논리로 설득하더라도 이들이 선뜻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복지에 대해 계속 불편한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은, 그 마음 속 깊이 아득한 선대의 조상들로부터 우리 모두 물려받은 그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부득이하여 복지 정책을 확장한다고 해도 그냥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주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에 분명한 권력의 위계와 권리와 책임을 확인하는, 옛날 사회에서나 있었던 무언가의 푸닥거리를 벌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심리가 나온다.

 

경상남도에서 도지사와 도의회가 일방적으로 무상급식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교감이라는 이가 식당에 줄을 선 학생들에게 급식비 안 낸 학생들 이름을 큰소리로 떠들어가며 돈 안 낼거면 당장 꺼지라는 폭언과 모욕을 주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 급식비의 재원은 본인들이 낸 돈도 아닌 데 왜들 그랬을까. 여러 분석과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 ‘감사와 머리 조아림의 확인없이 그냥 줄 수는 없다’는 푸닥거리의 심리가 그러한 비상식적 행동의 상당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난 몇 년간 복지 정책이 확장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보수층 일각의 불편하게 꼬인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안 주겠다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단 자기가 정말로 급식비가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임을 무려 14개의 문서를 구비하여 증명해야만 주겠다는 것이다. 또 ‘핸드폰 통신비는 내면서 밥값은 안 내는’ 파렴치족이라는 것을 모든 학생들 앞에서 분명히 밝혀 면박을 주는 처벌 정도는 ‘교육적’ 조치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냥은 못 내준다’는 말이다.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얼마나 많은 논쟁과 홍역을 치렀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제도로 정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듯 하며, 그렇게 결론이 나게 된 합리적인 설명과 주장들에 대해서도 싹 무시해 버린다. 아무 말도 필요없다. ‘그냥은 못 내준다’는 것이다.

나는 무조건적으로 보편적 복지의 이상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 이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복지라는 것을 모든 이들의 권리라고 보는 그 기본 사상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된다. 복지가 더 이상 우월한 자들이 열등한 자들에게 베풀어 전자는 더욱 우월해지고 후자는 더욱 열등해지도록 만드는 권력의 장치가 아니라, 사회 성원 모두가 평등하게 함께 책임지고 함께 향유하는 모두의 보물로 만들어서 또한 모든 성원들이 형제 자매로 더욱 사랑이 깊어지는 사회적 연대의 장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 철학이다. 복지 국가로의 길은 아직 멀고, 거기에는 해결하고 풀어야 할 숱한 과제들이 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넘기 힘든 과제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복지 정책을 둘러싼 ‘권력의 심리학’의 문제이다. 단순한 돈 계산에 근거한 ‘합리적인’ 설득만으로는 이 문제를 넘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들이 그러한 비합리적인 심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복지의 수혜를 받는 이들이 이들과 평등한 이웃들이며, 또 그냥 ‘베풀어 주어야 할’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함께 마음과 힘을 합쳐서 함께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동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들 모두가 실제로 그렇게 능동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만들어갈 도량과 능력을 갖춘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사회적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몇 천년을 내려온 ‘주고 받음의 정치 심리학’을 우리 대에서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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