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시민] ‘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 윤리와 가치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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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사회적시민]

‘사회’를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 윤리와 가치의 행동 

‘사회’를 만들어 낸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말로 들릴 수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인간 세상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영어 society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다른 유럽어 단어들이 이런 큰 뜻을 가지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18세기 중반까지도 이 말은 자기와 인격적 대면 관계를 가지는 인간 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19세기 말 일본인들이 처음 이 단어를 번역할 때에 쓴 단어도 ‘교제(交際)’였다. 그야말로 ‘사교계’나 ‘결사체’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사회성’이 좋다는 말은 사람을 잘 사귀고 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관계가 잘 맺어지도록 매개 역할을 잘 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사회적 시민’의 가장 중요한 덕성과 능력은 스스로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이들이 위축되거나 아예 질려 버릴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이 다른 낯선 사람들을 사귀고 관계맺는 평균적 역량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다. 하물며 ‘사회’를 만들어 낸다고? 나는 이것이 지나친 걱정이며 스스로의 역량과 남의 역량에 대한 과소평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며 또 나아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유가 있다. 지난 번 칼럼에서도 썼지만, 인간의 존재 자체에 우선 그러한 능력이 모두에게 내장되어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 언어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언어 능력의 본질은 바로 스스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 능력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말한 이 중 하나가 바로 아담 스미스이다.

따라서 우리가 관계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다른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도 내장되어 있는 그러한 관계 및 사회 창출의 능력을 일깨우기만 하면 된다. 혼자서 그 모든 관계를 다 만들고 그것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제도와 장치까지 모두 설계하고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예수나 석가모니가 오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쉽게 얼마든지 관계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태극권에서는 오랜 수련을 겪은 태극권 수행자라면 아무리 무거운 사람도 펑펑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상대가 무쇠로 만든 소라면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태극권의 수련에서 나오는 힘은 수련자의 몸에서 전적으로 생겨나는 힘이 아니라 그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수련자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감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에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다. 사람이 길들일 수 없는 짐승들 여러 마리와 한 가족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개처럼 사람과 정서의 감응이 쉬운 동물이라면 여러 마리와 쉽게 한 덩이가 될 수 있으며, 하물며 말과 감정과 생각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무수한 이들과 함께 한 집단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말은 쉽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모두 가지고 있는 사회적 능력을 깨워내야 하는 데, 이게 쉽겠는가. 사람이 어지간해서 말을 듣는단 말인가. 그러니 사람들이 서로 모여 함께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고작해야 그를 통해 무언가 자기 스스로의 이익을 늘릴 수 있을 때 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담 스미스 이후 그를 따른 많은 사회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에 두고 사회성이란 오직 거기에서 파생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에 선 바 있다. 그러니 진짜로 인간의 사회성이 발현되는 곳은 각자 자기의 돈계산과 잇속을 차리기 위해 모여든 ‘시장’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각자의 잇속과 배가 맞을 때에만 일시적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것 말고는 인간 사회를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까지 하기도 한다. 옛날 영국의 댓처 수상이 말했던 ‘개인만 있을 뿐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가 바로 이러한 생각이다.

시장과 개개인의 자기 이익이라는 것 또한 물론 사람들을 서로 모으고 뭉치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완전히 까맣게 잊어먹고 있는 장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윤리이다. 태초에 신석기 농경 혁명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군집을 안정적이고 큰 규모의 ‘사회’로 전환시켰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술의 혁신이 바로 이 윤리의 발견이었다. 이는 어느 민족 어느 문명이든 가지고 있는 창조 신화에 예외없이 드러나는 바이다. 태초에 혼돈 혹은 전쟁 상태가 있었지만, 여기에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서 인간이 살아갈 바른 길을 밝혀 보이고 몸소 그것을 행하였으며, 여기에 모든 인간들이 감화되면서 비로소 ‘인간’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천편일률의 줄거리이다. 윤리란 절대로 무슨 돌판 따위에 신이 일방적으로 휘갈겨 놓은 잔소리나 명령 같은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또 ‘옳다’고 느끼는 행동의 준칙들로서, 이를 행하자고 누군가가 나서서 외치면 여러 다른 사람들도 쉽게 공감하고 또 쉬이 거스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여러 다른 사람과 함께 머리와 마음과 행동을 하나로 합쳐 관계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자기와 타인의 사회성을 풀어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으로 효과적인 열쇠는 바로 윤리와 가치이다.

그런데 여기에 빠진 중요한 요소 하나가 있다. 방금 말을 읽으면서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윤리가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의 경험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놀이터에서 담배 피우는 청소년 무리에게 또 맘대로 불법과 탈법을 자행하는 권력자들에게 윤리를 들먹이며 그러지 말라고 하면 사회가 생기기는 커녕 몰매나 맞고 직장에서 쫓겨나기 십상이 아닌가. 돌판에 쓰여진 윤리 준칙 따위가 무슨 힘이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에 무슨 감화력이 있다고 여기에서 사회가 생겨난다는 것인가. 윤리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윤리는 만인의 가슴 속에 잠재한 사회 형성의 능력을 풀어낼 열쇠임이 분명하지만,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서는 그 열쇠를 쥐고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하다. 즉, 윤리는 그 준칙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사회를 형성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동서양의 고전에 무수히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역사상 알려진 가장 극적인 예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유태인들에게 전승되어 오는 율법은 오래된 가치와 윤리를 담은 준칙이었고 오랜 시간 동안 유태인들이 갖은 시련 속에서도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준 것이었지만, 예수가 살던 당시에는 이미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저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한 그야말로 돌판 위의 글자로 화석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예수는 그 율법을 들먹이는 대신 그 율법의 정신이라고 스스로 믿었던 가치에 입각하여 진심을 담아 온 몸으로 살고 만나고 행동하였다. 복음서를 믿는다면, 이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무수한 이들에게 정말로 공동체가 회복되고 신께서 약속하신 세상이 정말로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었고 이들을 뭉치게 만들었다. 이렇게 그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지펴놓은 불, 인간이 평등과 사랑과 희망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이 활성화시킨 사람들의 사회적 능력은 그와 함께 ‘부활’하여 로마 제국을 정복했고 몇 천년간 인간의 역사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예수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시민’은 바로 이러한 윤리 및 가치의 힘을 믿고, 그것을 머리로 입으로 운운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삶과 행동에서 그것을 융화함으로써 ‘사회’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거창하고 어마어마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입에 발린 소리는 믿지 않지만, 그 소리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게 되고 결국은 자기의 몸과 마음도 내어주는 존재이다. 우리 모두 우리가 정말로 믿고 행할 수 있는 가치 하나를 정해놓고 변치말고 시시각각 그 가치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도록 스스로를 길들여보자. 우리 주변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열고 자신들에게 내재한 사회 창출의 능력을 합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던가.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간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동물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글.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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