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시민] 산업시대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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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민주주의는 아주 오래 전에 생겨난 정치 체제이다. 고대 그리스 초기의 폴리스에서는 큰 땅과 큰 재산을 소유한 소수의 귀족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는 다수의 시민들을 부채의 노예로 만들고 정치적으로 핍박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자 이 ‘다수의’ 시민들은 함께 뭉쳐 귀족들과 맞섰고,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제도적으로나 또 권력의 균형에서나 다수의 통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체제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발달을 서술하면서 강조한 것이 ‘소수의 부유한 권력층’과 ‘다수의 가난한 평민들’의 대립 구도였다. 즉 단순한 숫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다수는 가난하고 힘이 없게 마련이다. 힘과 재물을 갖춘 이들은 항상 소수이기 마련이다. 숫자로만 보면 당연히 다수 쪽이 이길 것 같지만, 문제는 ‘단결’이다. 소수는 숫자가 적지만 또 그 때문에 더 똘똘 뭉치기가 쉽다. 다수는 흩어져 있는 데에다가 생각도 이해 관계도 제각각이라서 뭉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미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하여 얼마전까지 민주주의의 문제는 거의 순전히 이 ‘다수’가 힘을 뭉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모두 함께 힘을 뭉쳐 저 오만하고 부패한 한 줌의 권력자들을 몰아내자’는 것이 몇 천년간 넓은 의미의 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적 패러다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농경제 시대의 이야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 및 자연의 힘에 거의 전적으로 기대게 되는 농업이나 어업 목축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시절, 권력은 오롯이 정치 영역의 문제였다. 따라서 다수가 ‘모두 함께 힘을 뭉치기만’ 하면 정치 영역을 장악하여 권력을 실질적으로 빼앗아오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업 사회에 들어서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산업 혁명이란 기본적으로 산업의 모든 과정을 물리적 화학적 과정으로 분해하여 이를 최대의 효율을 낳도록 재배치한다. 그리고 좁은 의미의 생산 뿐만 아니라 이를 둘러싼 인간 세상의 사회 경제적 제도 전체가 그러한 생산 기술의 변화에 조응하도록 끝없이 변화해야 한다.

대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실제의 삶을 펼쳐내는 장은 바로 이러한 산업과 사회 경제적 영역이다. 옛날 농경제 시대에는 제 아무리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절대 권력자라 해도 그 자연적 산업을 멋대로 바꿀 수는 없었고, 그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 경제 제도를 이리저리 바꾸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산업 사회의 산업은 기본적으로 인위적인 질서이며, 그에서 파생되는 노사 관계, 복지 제도, 조세 제도 등의 사회 경제 제도는 더욱 더 인위적이고 탄력적이다. 따라서 산업 사회에서는 이런 것들을 어떤 식으로 바꾸고 설계하느냐에 따라 보통 사람들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갖게 된다. 300년 전 영국에서는 이자율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런던 주변의 상업 및 금융 네트워크에서나 중요한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온 나라 사람들의 삶을 강타할 문제가 되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권력의 소재지는 이제 산업과 사회 경제 제도를 어떻게 짜느냐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19세기에 벌어졌던 시민 혁명의 귀결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 전역에서 줄줄이 벌어진 시민 혁명으로 권력을 내놓게 된 기득권층은 바로 이러한 산업과 사회 경제 제도 속으로 권력의 또아리를 옮겨간다. 겉으로 보면 민주 세력이 정치 영역을 장악하고 공화국 최소한 입헌 왕정을 성립시키면서 민주주의에 한걸음 다가간 듯했다. 하지만 지배 세력은 대신 산업을 장악하고 금융망을 조직하면서 엄격한 노동 시장과 일방적인 자유방임 시장 정책을 내걸고 이를 자신들의 권력의 아성으로 삼았다. 비록 형식적인 정치적 자유는 쟁취했다고 해도,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권력층의 노예 상태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1848년 프랑스에서 다시 부르봉 왕정에 맞서는 민주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부르주아들이 노동자 및 빈곤층에게 함께 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나가 정치적 자유를 챙취하자고 선동했을 때, 아나키즘의 아버지 조셉 프루동은 냉소적으로 씹어 뱉었다. “노동자들이 투표권이 없어서 괴롭나? 빵과 일자리가 없어서 괴롭지!”

농경제 시대에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비법이 단순히 ‘함께 뭉쳐 싸우자’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제 사회의 권력은 이미 국회 의사당이나 청와대 백악관에서 빠져나와 공장으로 복지 회관으로 면접 시험장으로 이동하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힘을 뭉쳐 정권을 잡아 봐야 이렇게 산업과 사회 경제 제도에 새로 또아리 튼 지배층의 권력은 난공불락이며, 사람들은 투표권이 있어봐야 변함없이 현실에서는 이들의 권력에 종속되어 굽신거릴 수밖에 없다. 80년대의 젊은이들은 군부 독재 정권의 폭력에 짓눌려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제약당했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좋은 일자리를 제공할 힘을 가진 세력에게 짓눌려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제약당한다. ‘다수의 권력’이라는 민주주의를 산업 사회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산업 관계 그리고 다양한 사회 경제적 관계에서의 실질적 평등과 권력 재분배를 이루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을 새로이 조직할 수 있는, 그리고 다양한 사회 경제 제도를 새로이 재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과 전망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함께 뭉쳐 싸우는’ 것만으로는 산업 사회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산업 사회를 만들어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함께 뭉쳐’ 논의하여 계획과 전망을 마련해야 하며, 이를 현실에 관철시키기 위해 다시 ‘함께 뭉쳐’ 노력해야만 한다. 산업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졌다. 이러한 어려움은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었던 서구의 모든 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산업과 사회 경제 제도를 제대로 바꾸어 낼 계획이 마땅치 않으면 정권이 어느 정당으로 넘어가든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는 큰 변화를 주지 못하며, 사람들은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무관심해지며 투표장에도 나가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근대 몇백년의 역사에서 인류가 이루어낸 민주주의라는 정치 제도의 정당성 자체가 근본부터 잠식당하게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탈민주주의의 시대”가 오고 만 것이다 (콜린 크라우치, 이한 옮김, [포스트 민주주의] (미지북스)).

우리나라에서도 평범하게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은 마찬가지로 만연해 있다. 바로 2년전 만 해도 대통령 선거에 나온 모든 후보들은 입을 모아 경제 민주화와 복지 정책의 확대를 약속하였지만, 지금의 여야 정당들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는가 싶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쪽을 찍어도 저쪽을 찍어도 삶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절박한 하루하루의 삶에 문제를 풀어가는 데에 너무나 지쳐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민주 세력’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또 다시 옛날 농경제 시대에나 통할 법한 민주주의의 레시피, ‘함께 뭉쳐 정권을 쟁취하여 세상을 바꾸자’는 말을 끝없이 반복한다. 사람들의 피로감은 극에 달한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확장을 위해서 ‘보통 사람들이 함께 뭉치는’ 것의 중요성을 부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또 지금처럼 사람들이 정치에 환멸과 무관심에 절어있는 상태를 변호할 생각도 없다. 문제는 ‘함께 뭉쳐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정당들은 소수의 정치가들이 뭉친 계파간의 싸움으로 거의 마비되어 버렸고, 보통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지금과 같은 무권력 상태에서 끌어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지금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기존의 정당 정치의 위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단지 표를 동원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견과 행동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주체로 보고 그에 기반하여 새로운 질서로 건립되는 21세기 형의 정당이 만들어져야만 한다. 우리가 그동안 이야기해 온 것처럼, ‘사회적 시민’의 정당이 지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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