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시민] 칼 폴라니와 ‘경제적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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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폴라니와 경제적 인간

글. 홍기빈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

 

‘자활’과 관련하여 보수주의자들이 신봉해 온 오랜 믿음이 있다. ‘과도한 복지와 도움’은 사람들의 자활 의지를 꺾고 의존성과 무기력만 키우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진정한 자활’을 위해서는 당사자가 자신의 힘든 상황을 직면하고 이겨나가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타인이나 사회의 도움은 정말로 필요한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아예 없애는 것이 옳다고까지 믿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 뒤에는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인간관, 이른바 ‘경제적 인간’이라는 신화가 깔려 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게으르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게으름뱅이인 인간이 몸을 움직여 스스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는 오로지 눈 앞의 이익이 보일 경우 그리고 굶주림의 고통이 엄습할 경우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만드는 데에 바로 자본주의의 장점과 위대성이 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이익을 계산하여 마음껏 추구하도록 할 것이며, 굶주림에 처한 인간은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도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조직될 뿐 아니라 사람들 또한 가장 강건하고 합리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저 유명한 1834년 영국 신구빈법 탄생의 배경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말 그럴까.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가꾸면서 열심히 일하게 되는 힘의 근원은 이익에 대한 탐욕과 굶주림에 대한 공포 뿐일까. 이러한 생각은 과연 인간의 실제 삶과 행동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서 나온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깊이 파고든 이가 잘 알려진 헝가리 출신의 경제 사상가 칼 폴라니이다. 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류학과 역사학의 여러 자료들을 뒤져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들이 어떠한 동기로 일을 하게 되는지를 조사해 보았고, 그 결과 참으로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이익과 굶주림은 인간을 움직이는 여러 동기들 중 하나이거나 존재 조건일 뿐, 그 자체로 사람을 일하게 만드는 ‘자연적’ 동기인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돌보고 열심히 일하게 되는 동기의 근원은 그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인생의 의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의 주저 [거대한 전환](홍기빈 역, 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19세기에 들어 서양인들이 아프리카 내륙 지역으로 침투하면서 삼림 속에서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던 원주민 부족을 통째로 파괴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 재난을 가까스로 피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도망친 원주민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기존에 삶을 함께 영위하던 마을 공동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굶주림의 공포에 직면한 상황일 터, ‘경제적 인간’의 신화에 따르면 이들은 응당 물고기를 잡고 과일과 먹을 것을 채집하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정반대의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멍하고 누워 마치 해변에 끌려나온 물고기처럼 숨만 헐떡헐떡 쉬다가 그대로 죽어간다는 것이다. “시냇물에는 물고기가 득실 거리고 나무 위에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데도 말이다. 경제학과를 다니면서 ‘경제적 인간’이라는 인간관에 절어서 자라났던 필자가 이 구절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째서일까. 폴라니의 설명은 대략 이러하다. 먹을 것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존재 조건이지만, 이것이 곧바로 인간을 움직이고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실로 다양하고도 다면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는 실로 다양할 수밖에 없으며, 그 하나하나가 모두 노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 관건은 그러한 무수한 인간 행동의 동기 중에서 사람이 어떤 것을 자신의 인생의 의미로서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들처럼 영혼의 구원이라는 종교적 가치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일생 동안 어마어마한 양의 노동을 행한다. 자기 자식들과 가족의 안녕이야말로 자신의 삶의 이유요 의미라고 생각하는 이는 그 안녕을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지고 뼈를 갈아 노동을 행한다. 힘들고 불우한 이웃들을 돕는 것에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아침 6시에 나와서 무료 배식 아침 식사 준비를 거든다. 이러한 동기는 대박에 대한 탐욕에서 나온 것도 굶주림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그 효율성과 노동 강도는 전혀 뒤떨어지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 중 자기 혼자서 이렇게 스스로의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으로 삶과 노동의 이유를 속에서부터 끄집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 말마따나 ‘신 아니면 동물’일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단위는 오로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살아가는 인간 사회 안에서 뿐이다. 그 사회 안에서 태어나 자라나며 여러 욕망과 욕구를 키우고 배우며, 그것들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깨닫고,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삶은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며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를 생각하고 선택하고 희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기 스스로의 ‘인생의 의미’가 없다면, 사람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밤이 되도록 그 힘든 노동으로 땀흘리는 일을 매일 반복할만한 용기와 힘을 낼 수 없다.

이제 그 불행한 원주민으로 되돌아가보자. 그가 태어나서 자라나고 자신의 인생을 한땀한땀 짜왔던 공동체가 통째로 날아간 상황이다. 일단 백인들이 쫓아오지는 않으며, 주위에는 먹을 것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일 수는 있다. 하지만 살아서 뭘 할 것인가?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처럼, ‘살아 있으나 죽어 사라지나 뭐가 다른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었던 삼촌과 어머니가 간통범이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며 왕좌를 찬탈한 반역자라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고 복수의 의무까지 걸머지게 된 햄릿도 이 수풀 속의 원주민과 다르지 않다. 헐떡헐떡 숨만 쉬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미친 사람이 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폴라니의 외침이다.

이런저런 인생 풍파 속에서 삶이 망가져 버리고 결국 사회의 원조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게 된 이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정말 이들이 ‘굶주림의 공포’가 부족하여 계속 망가진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이들을 더 가혹한 삶의 조건으로 몰아넣으면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강건한 인간으로 우뚝 서게 될까? 폴라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공포를 이미 오래 전부터 겪으면서 살아온 이들이며, 그러한 뻔히 보이는 공포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스스로의 삶을 가꾸고 역경을 뚫고 나갈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기에 그 상태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어느 정도의 어려움과 곤란은 사람에게 더 힘을 내게 만드는 자극이 되지만, 사람이 견뎌내고 다룰 수 있는 어려움과 곤란의 양에는 뻔한 한계가 있다. 그 역치를 훌쩍 넘어서는 곤란이 닥치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햄릿이나 아프리카 수풀 속에 혼자 남겨진 원주민과 같은 상태가 되며, ‘살아 있으나 죽어 사라지나 뭐가 다른가?’라는 두려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무저갱의 지옥에서 헤쳐나와 다시 자신의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스스로 삶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상태로 거듭 나는 것 – 그것이 바로 자활일 것이다.

그러니 자활도 복지도 ‘경제적 인간’이라는 1차원적인 인간관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관건은 삶의 의미를 잃은 이들이 그것을 다시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 그 관건은 그들이 그러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가 마련되느냐 마느냐에 있다. 사회적 관계를 능동적으로 창출할 수 있는 강건한 시민, ‘사회적 시민’이 함께 하는 세상이 그래서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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