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시민] ‘7시간 미스테리’보다 중요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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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간 미스테리보다 중요한 문제 

 

글.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세월호 사건이라는 비극이 벌어지고 어느 덧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소중한 비판과 성찰의 이야기들을 내놓았지만, 그리고 정말 믿기싫고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사회의 여론은 완전히 두 쪽이 나고 말았다. ‘일베’ 등과 같이 극단적인 입장이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이들은 ‘그만 좀 해두어라. 교통사고 나서 죽은 것 가지고 왜 몇 달 째 온 나라를 북새통으로 만드느냐’는 불만을 품고 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세월호 사건이 어찌 피해자 유족들만의 일인가.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그것도 반드시 제대로 풀고 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견해와 정서 사이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시민’이 출현하고 있으며, 이들이 그 이전의 사람들과 얼마나 사고 체계와 정서가 다른가를 이처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없다고 하겠다. 세월호 사건이 너무나 가슴 아픈 비극이라는 점 만큼은 모두의 생각이 같다. 하지만 관건은 ‘그건 어디까지나 피해자 개개인들의 사정일 뿐 전체의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이건 어느 개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즉 집단으로서의 사회 전체의 일이며 따라서 누구도 이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느냐의 관건이다. 견해가 충돌하는 두 쪽이 감정이 악화되다보면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이라고 혹은 ‘자기 일도 아닌 것을 저렇게 떠드는 것은 틀림없이 불순한 정치적 동기를 가진 족속들’이라고 매도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원인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은 불가분으로 엮여있다’는 명제에 대한 생각의 차이이다.

이 명제는 아름다운 명제이며, 아주 위악적이거나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이 명제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중히 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 명제를 어느 차원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농경 사회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태도와 발달된 현대의 산업 사회의 논리를 이해하는 이들 사이에 큰 차이가 나타난다.

먼저 전자부터 살펴보자. 전통 사회의 기본적인 태도는 이를 주로 감정과 정서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며, 현실적인 이해 관계로까지 받아들여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 역사의 어느 사회에나 불행한 처지에 있는 이들은 도처에 있었다. 누구나 이들을 보면 딱하다고 안됐다고 생각하는 ‘감정의 연대’는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이며 그(녀)들의 운명이 불가분으로 엮여있다는 명제는 그저 교회나 사찰에 가서 듣는 우주적 차원에서의 진리의 이야기일 뿐, 현실적으로는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전통 사회에서는 우선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농업, 어업, 목축업 등의 1차 산업에 기반하여 어느 정도의 상업 정도가 결합된 것이 그 산업 구조였던 바, 이러한 산업은 작은 공동체나 심지어 개별 가족 차원에서 생산 활동이 조직되는 상태였으며 전 사회 차원에서의 조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원과 권력은 왕과 귀족 등의 지배 계급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누군가 불행한 이웃이 나타난다고 해봐야 비슷한 처지의 평민들로서는 무언가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누가 불행한 처지에 빠지는 일이라는 것도 각자의 ‘팔자소관’으로 치부될 뿐이었고 그저 딱하다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러한 ‘감정적 차원에서의 연대’가 아주 크게 차오르면 자기 가진 것을 풀어서 나누는 ‘자선’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도움이 아니라 사회 전체 차원에서의 토론과 집단적 노력으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나오기 힘들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의 산업 사회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가 되었다. 우선 산업은 더 이상 소규모 생산 조직의 자급자족으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나아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조직된다. 이렇게 되면 그 기나긴 생산 과정의 연쇄를 맡고 있는 다른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나의 경제적 운명과 처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큰 돈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들이 수익률이 별 볼 일 없다는 생각에서 돈 줄을 졸라매게 되면 사회 전체의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실업자들이 양산된다. 먼 나라의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지게 되면 내가 일하는 직장도 일거리가 없어 당장 인원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에서는 ‘남의 행복/불행과 나의 행복/불행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명제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게다가 정치 체제 또한 이제 더 이상 왕과 귀족들이 독점하는 지배 체제가 아니다. 최소한 원리상으로나마 현대 사회는 분명히 모든 이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에 따라 정치 영역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의 조직과 제도도 바꿀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이다. 이 상황에서는 톱니바퀴처럼 긴밀히 엮여 있는 사회 전체의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책임과 권리가 오롯이 ‘시민들’ 전체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나와 너의 이익을 넘어서 ‘우리 전체’의 행복과 불행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조직과 개선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시민들’의 운명이 된다. 이를 자각하는 이들이 바로 ‘사회적 시민’이라고 할 것이다.

이제 세월호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나와 너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전통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이를 여전히 피해자와 유족들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이들에게 동정하고 함께 슬퍼하는 ‘감정적 연대’는 이들도 아끼지 않지만, 이러한 ‘그들’의 문제가 비화되어 국회가 멈춘다거나 자신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국가 재정에서 지나친 규모의 배상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큰 불만을 갖는다. 이들이 결코 냉혈한이어서가 아니다. 전통적 태도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시민’은 이 문제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는 피해자 및 유족들의 ‘팔자소관’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라 해운업 전체의 구조, 이를 둘러싼 국가 기관과의 관계, 그리고 전혀 해명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파생되는 대단히 황당한 부조리와 부패의 연계 등등에서 생겨난 사회의 총체적 부실에서 생겨난 사건이라고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어디서나 걸려들기만 한다면 누구나 똑같은 재앙을 입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리스크’라고 파악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 해야 할 일은 저 부도덕한 선장이나 이 세상에서 사라진 유병언씨 등을 때려잡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이런 구조가 나타났는가를 명확히 밝혀내고 근본적으로 바꾸어 내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한가에 대한 토론과 논의이다. 그럴 리 없겠으나, 만에 하나 유족들이 지치고 힘들어 이러한 과제를 방기하게 된다면 그들과 독자적으로 우리 스스로가 받아안고 해결해 나가야 할 ‘우리의 문제’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사회적 시민’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점을 아직 전통적 사고 방식에 묶인 분들에게 계속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섣불리 그들을 ‘냉혈한’이니 ‘수구 꼴통’이니 하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운동이 지나치게 현 정권에 대한 반대와 공격이라는 정치적 전선에 매몰되어 오지 않았는가라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책임을 진 정부와 여당에 대해 해야 할 비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프레임 자체가 정권 반대라는 것으로 이동하는 것은 크게 어긋난 일이다. 수사권 기소권을 포함한 특별법이 왜 필요한가를 차분히 끈기있게 설명하고 홍보하는 일이 ‘7시간 미스테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일보다 몇 십배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시민’에게 소중한 것은 정치적 당파성이 아니라 사회의 현실에 대해 모두가 함께 각성하고 함께 새로운 연대의 윤리와 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세월호 사건은 성숙한 ‘사회적 시민’의 출현을 위한 중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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