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사회적 시민] 노동, 평등,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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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평등, ‘신분’

 

글.  홍기빈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

전통 사회가 위계적 서열에 입각한 ‘신분’으로 조직되어 있는 반면, 근대 혹은 현대 사회는 만인의 평등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계약’으로 조직된다는 점은 이미 모든 이의 상식이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질서 원리의 차이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노동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생각해보자.

요즘은 노동이라는 개념이 너무 남용되어 누구나 자신을 (유리할때만!) 노동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본래 노동이란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이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활동’을 일컫는다. 그렇기 때문에 근로 계약서에는 구체적인 업무가 명시되어야 하며, 그 반대 급부로 주어지는 임금과 근무 조건 계약 형태가 명시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방금 말한 노동의 정의와 관행을 조금만 음미해보면 이게 과연 신분의 문제인지 계약의 문제인지가 굉장히 애매하겠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는 이는 누구이며, 그 일을 어거지로 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보다 신분 차별의 정의에 더 가까운 관계가 무어가 있겠는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근로 계약서라는 형태를 보면, 분명히 두 사람은 평등한 관계이며 그러한 일 시킴과 일 함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 명시되도록 되어 있다.

요컨대 문제는 이러하다. 남이 시키는 일을 대신 해주고 생계를 보장받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신분 지배 관계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형식은 어디까지나 평등한 관계로 되어 있다. 이렇게 오늘날의 노동이라는 문제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게 되어 있으니, 실제의 노동자가 과연 평등한 존재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사실상의 ‘아랫 것들’과 같은 신분 차별의 희생자로 살아가는가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 중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압도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근대의 노동 운동 특히 사회민주주의와 결합된 노동 운동이 ‘평등’이라는 원리를 실질적인 사회의 조직 원리가 되도록 만드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이 나온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은 (물론 둘 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이기는 했다) 별개의 운동이었다. 전자는 시장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횡포에 맞서 경제적 약자와 사회를 보호하자는 운동이었으며, 후자는 시민 혁명의 각성으로 모든 평민들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19세기 전반 영국에서 로버트 오언이 이끌던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 참정권을 주장했던 차티스트 운동이 전혀 별개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 이 두 운동은 처음에는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따로 놀았다.

이 두 운동이 실질적으로 결합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 독일의 정치가 라살레 Ferdinand Lassalle가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건설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유럽 대륙에서의 노동 운동 특히 사회민주주의 조류의 노동 운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1인1표’라고 하는 정치적 형식적 평등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회의 목소리를 전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제아무리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고 법이 공평하게 집행된다고 해도, 노동자라는 존재는 임노동의 관행이 철저하게 평등의 정신에 입각한 공정한 계약이 될 수 있게 해 줄 각종 법적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못한다면 실제의 노동 과정에서 언제나 하인 하녀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 존재임을 이들이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 자본주의의 횡포에 맞서 노동자와 같은 약자와 사회 전반을 보호한다는 (개혁적) 사회주의의 목표는 오로지 민주주의의 ‘평등’이라는 원리를 법적 제도적으로 강화하여 우리의 사회경제적 삶의 영역을 실질적으로 조직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는 것, 또 그 반대로 진정한 민주주의란 이러한 노동을 행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다수 대중의 평등을 보호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나 아나키즘을 외치는 급진적 노동운동과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내에서 평등이 실질적인 사회의 조직 원리로 자리잡는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하게 된다.

여기에서 시간표를 2015년의 한국으로 돌려와보자. 지금 우리 사회의 노동은 과연 ‘신분’인가 ‘계약’인가? 여기에서 뼈아프지만 노동이 다시 둘로 갈라져 있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정규적으로 고용되어 노동3권과 고용 보장을 얻고 있는 이른바 정규직 노동자들과 그러한 보호 장치를 제대로 얻지 못한 불안정 노동자들로 말이다. 불안정 노동자들도 이른바 근로 계약서를 쓰지만, 이들이 실제로 행하는 노동을 신분이 아닌 평등의 그것으로 만들어 주는 데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용 안정성이 떨어진다면 임금이 높아야 한다. 그리고 임금이 낮다면 고용 안정성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설령 노동 시장의 논리에 따라 노동의 댓가가 결정되도록 한다고 해도, 동일 노동에 대해서는 동일 임금이 주어져야 하며 오로지 고용 형태의 차이라는 이유에 의해서만 임금 격차가 나타난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원칙과 원리에서 불리한 것만 모조리 모아져 있는 것이 지금 한국에서의 불안정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고용 안정이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임금은 전체적 평균으로 따져보아 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반 가량에 불과하다. 분명히 나란히 똑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에도 임금 뿐만 아니라 여러 근무 조건과 수당 및 복지 혜택에서도 차별이 있다. 노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이른바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는 쪽은 이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대 보험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더 취약한 노동 조건에 처해 있는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노동조합에는 가입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오만 미사여구와 글줄을 동원하여 불안정 노동자들도 ‘평등’한 존재라고 외쳐봐야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노동이라면, 사실상 ‘신분’의 서열 차이가 매겨져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불안정 노동자라는 처지가 되는 것을 극력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노동에 씌워져 있었던 전통적 신분 사회의 굴레를 벗겨내고 노동이 실질적인 평등이 뒷받침된 버젓한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되도록 확립했던 노동 운동의 정신에 입각한다면, 이러한 상태를 더 오래 가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평등하며, 모두가 살아야 하고 지켜내야 할 생활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과 같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들만 잔뜩 뒤집어 쓴 채 엄청난 임금 격차에 시달리는 다수의 사람들로 노동 시장이 쪼개져 있는 상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스웨덴의 노동조합은 1950년대에 이미 모든 노동자들은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는 평등한 이들이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임금 격차를 해소하고 최대한 모든 노동자들이 동일한 수준의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연대 임금제’라는 운동을 펼친 바 있었다. 우리도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었다.

‘평등’해야 할 노동의 엄청나게 많은 숫자가 사실상의 ‘신분’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 데에 우리 모두의 책임은 없는지. 나아가 우리는 정말로 마음 속에서 모든 이들의 노동은 평등하다는 정신을 믿고 있는지. ‘사회적 시민’은 결코 어떤 형태로든 신분이라는 것이 다시 현대 사회에 살아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존재이다. 불안정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불평등으로 점철된 우리의 노동 현실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그래서 피해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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