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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과 함께 사는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출처 :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43> ‘호이트한국’ 이래경 대표 : 13-11-17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신이시여, 어디로 가나이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물음 앞에서 답할 준비를 하고 있을까. 2013년에 만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이래경 공동대표(‘호이트한국(주)’ 대표) 는 마치 이것에 대해서라면 늘 준비된 것처럼 당당하게 답했다.

“시대와 상황이 요구했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하려고 했을 때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중략)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이에 제한받고 규정된다고 할 때 오늘 이 시점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대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것이다.”

오늘의 시대정신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종교를 가지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려웠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기독교의 영향으로 예수를 알리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학교 안을 돌아다녔던 열혈소년 이래경. 유신이 뭔지, 독재가 뭔지 알지 못했던 그는 대학에 들어와서야 독재정권과 인권탄압, 민주주의 억압이라는 현실에 눈을 떴다. 그리고 ‘민주주의 수호’라는 시대정신 앞에서 당시 4.19 혁명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서울공대 시위의 선봉에 섰다.

두 번의 제적으로 학교에 돌아가지 못했던 청년 이래경은 한국의 산업발전 궤적과 함께 오퍼상(영어 ‘offer’에서 파생한 일명 ‘보따리 장수’. 작은 규모의 무역상을 뜻한다) 사업을 시작으로 오늘의 호이트한국(주)을 일궈냈다. 깐깐한 독일 사람들도 인정한 CEO 이래경은 전 세계에 200여 개의 법인을 가진 연 매출 10조 원 규모의 독일 기업 호이트그룹에서 창업주 가족을 뺀 나머지 4만 명의 종업원 중 지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민주투사 고(故) 김근태를 도와 오랫동안 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했을까. 어떻게 철저하게 수입의 1/3은 국가에, 또 1/3은 사회에 환원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진보적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복지국가를 외칠 수 있을까.

“나와 타자의 관계는 ‘불일(不一)이요 불이(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이다. 결국 ‘나와 타자는 서로 맞물려서 함께 간다’는 뜻이다. 타자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진보’적인 것이고, 나아가 타자를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인간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인식 위에 동일한 존재로서 타자와 만날 때 비로소 연대가 있고 진보가 있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진보적 자유주의를 외치는 가슴 따뜻한 부자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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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독일의 호이트그룹이 국내 영업을 시작했고, 1988년에 합자형태의 법인 ‘호이트한국(주)’이 설립되었다. 유체동력학적 기술과 첨단 전자제어 지식을 결합한 산업기계를 제작하고 공급하는 회사라고 들었는데, 어떤 인연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인가?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이 적은 수입으로 6남매를 키우느라 생활이 매우 빠듯했다. 집안에 가진 것도 없고 대학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나 졸업장도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내 사업을 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졌다. 그래서 1984년에 내 사업으로 오퍼상 일을 시작했고 그때 만난 기업 중 하나가 ‘호이트(VOITH)’라는 독일 기업이었다. 호이트에서 들여온 철도 차량부품이 초기부터 대단한 성과를 거두면서 한국철도차량 사상 최초로 독자 설계한 ‘전후구동식 새마을동차’를 만들게 되었다. 이 분위기가 국제하계올림픽이 열리는 계기로 이어져 1988년 독일 본사에서 내게 한국에 현지 법인을 차리자는 제안이 왔다. 그 요구를 받아들여 ‘호이트한국’이라는 법인을 만들었다. 그렇게 주주 겸 대표이사를 맡아 여기까지 왔다.

 

외국 회사와 협력해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70~80년대의 오퍼상은 밑천 없는 사람들에게 성공을 만들어가는 신기루 같은 통로였다. 나는 운 좋게 매우 좋은 파트너를 만났다. 독일 사람들은 한 번 상대방을 신뢰하면, 그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편이다. 물론 내 자신이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철도차량 분야와 독일 호이트그룹 내에서도 나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호이트그룹은 전 세계에 200여 개의 법인과 전체 직원 4만 명을 거느린 연 매출 10조 원 규모의 기업인데, 이 4만 명 종업원 중에 창업주 가족을 빼고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만큼 독일 친구들이 나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다.

 

73학번으로 서울 공대 금속학과 출신이다. 당시 ‘금속학’은 다소 생소한 분야였을 텐데, 어떻게 가게 됐나?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기독교였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읽은 헨리크 센케비치의 <쿠오바디스>라는 소설에서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물려 죽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가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Youth For Christ (YFC)’라는 보수적인 종교반에서 활동을 열심히 했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목사가 주도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의신론(依信論)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고교생 써클이었다. 지금은 의신론이 우리 사회를 질곡(桎梏)시키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을 믿었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도 일주일에 세네 번씩 새벽기도를 나갔다. 학교에서는 매일 점심시간이면, 전도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렇게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던 소년이었다.

신학대학을 가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이 그렇듯 우리 어머니의 삶도 한 편으로는 시대상황에, 다른 한 편으로는 6남매를 키워야 하는 어려운 가정상황에 종교 없이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가장 큰 장점은 원칙적이고 타협하지 않다는 것인데,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나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교리논쟁을 했다. 어머니의 꿈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돼서 ‘형제감독’ 즉, 여호와 천국의 왕국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고, 나는 신학을 해서 개신교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릎 쓰고 신학대학에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신학대 진학을 포기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평소 존경하던 고1 담임선생님이 우리나라에선 소재산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시 포항제철이 완공돼 쇳물을 쏟아내던 시기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금속·철강 소재가 산업 입국에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상장을 독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하던 모범생이었다(웃음).

 

대학에 막 입학했을 당시는 유신이 시작된 바로 이듬해(1973년)였다. 스산했던 시절, 대학생 이래경은 어떤 청년이었나?

그때까지 나는 ‘유신(維新)’이 뭔지도 몰랐다.(박정희 독재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선포된 ’10월 유신체제’에 따라 12월 17일 국민투표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약칭 ‘유신헌법’)을 확정했다. (한국 헌정사상 7차로 개정된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은 정권 유지를 위한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신헌법’의 ‘유신’은 일본 명치유신에서 가져왔다. 편집자) 당연히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소위 ‘문제 서클’과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유로 몇 가지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공대에 진학했지만, 인문학적 갈증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인문학 강의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첫 번째 선택한 강의에서 읽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두 권의 책이 내 기본적인 종교관을 ‘확’ 흔들었다. 다니던 교회 목사에게 ‘내가 왜 교회를 떠나는가?’에 대해 장장 7장의 편지를 남기고 교회를 떠났다(하지만 지금도 내 신앙은 기독교다). 그 뒤 독서토론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사회문제의식이 있는 서클이라기보다는 당시 나오는 소설들을 편하게 따라 읽는 모임이었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황석영의 <객지> 등에서부터 세계명작 작품도 읽고 가벼운 소설들도 많이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읽었던 책들이 내가 편협한 사고에 빠지지 않고 삶의 균형을 잡는 데 매우 도움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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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충격은 당시 정치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시절 초기 나는 학내에서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학생들이 잡혀 들어간 사실에 관심조차 없었고, 그저 내 생활에만 바빴다. 그러면서도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총 4학기를 다니는 동안 한 학기에 2개월 이상 강의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개강하면 곧바로 휴교를 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나의 생각들이 독서토론회에서 읽고 있던 책 내용과 연결되면서 내게도 조금씩 사회의식이 생겼다. ‘뭔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이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시위 도중 죽기도 하고, 붙잡혀 강제 징집을 당하거나 제적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조용한 독서토론회 일원이었던 이래경이 75년 ‘김상진 할복자살 사건’ 이후 서울공대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 4월에 독서토론회의 멤버 중 하나였던 문리대 미생물학과 박우섭 씨(현 인천남구청장)가 4·3시위로 정학을 당했고, 4월 11일에는 농대 축산학과 김상진 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을 했다. 이것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장 야밤에 그때 다니던 교회 건물에 가 새벽까지 ‘인간해방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 3000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새벽 5시에 등교해 준비한 유인물을 공대 강의실과 화장실 곳곳에 뿌렸다. 유인물에 “아무리 서울공대생이 산업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침묵을 지켜선 안 된다.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라고 썼지만, 그날 이후에도 공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거의 모든 대학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는데, 서울대 공대만 정상적으로 수업하고 있었다. 4.19 혁명 시절에도 공부를 계속했던 일종의 ‘서울공대 전통’이었다.

그러다 4월 17일경, 농대 학생들이 공대 건물을 기습해 시위를 부추기는 선동을 하고,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 농대생들의 선동으로 학교 잔디밭에 수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그것을 집회 세력으로 이끌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의를 듣던 중에 뛰쳐나와 집회를 주동하게 된 것이다. 평소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지고 상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위가 끝난 후 청량리에서 막걸리를 진탕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형사들이 집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잠깐 조사받고 오겠다’고 하고 붙잡혀 갔다. 당시 친 이모부가 안기부 내 대학 및 종교담당 수석과장이었는데, 그 덕분에 3일 만에 그냥 풀려났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가 보니, 나를 포함해 당시 학교에서 불온시했던 서클 리더 7명 모두가 데모한 이튿날 제적됐다. 지금도 그 친구들에게는 마냥 미안하다.

 

어떻게 조용하던 청년이 앞에 나가 시위를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주도할 생각을 했나?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욱’하는 경향이 있다. 그땐 나도 순간 ‘욱’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기독교 신앙에 의해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예수신앙’의 핵심이라 할 ‘나라와 정 의’를 위해 자기를 던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 상황에서 침묵하고 출세를 위해 공부만 한다는 것은 나로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당시 순간에는 어떤 판단을 깊이 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평소 나를 굉장히 좋아했던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지 말라고 막았지만, 뿌리치고 나섰다.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내가 앞서 나가 김상진 열사를 위해 묵념하고 짧은 웅변과 만세삼창을 하고 노래했다. 그 후 잔디밭 자리에 앉으니, 연이여 학생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와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비록 그것 때문에 경찰에 붙잡혀가고 제명을 당했지만,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후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던가?

학교에서 쫓겨난 지 한 달 만에 인생이 360도 바뀌었다. 보름 만에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영장이 나왔고, 바로 입대했다. 당연히 군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최전방으로 떨어질지는 몰랐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강원도 인제를 넘어, 원통사단에 혼자 배치됐다. 당시 훈련소에서 교육받은 수천 명 중 나처럼 집회를 주동하다가 갑작스레 군대로 온 십여 명만 골라서 전방 여러 부대로 산개해 보낸 것이다. 운동권 출신들이 겪은 감옥살이는 당시 내가 겪은 군대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힘들었다.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한편으로는 고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과 세상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고 제대했다. 같은 부대에서 김삼수라는 친구(현 산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만났는데, 그 친구에게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조용범의 <후진국 경제론>,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등의 책을 추천받았다. 그렇게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한 것이 독서토론회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의식을 갖게 된 계기였다.

제대 후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취업을 해야 했는데, 당시는 인력 부족이 심각했던 터라 ‘아남산업’이라는 곳에 쉽게 취업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대 공대 산업경영연구회와 산업사회연구회 써클 출신 친구들이 함께 공부하자며 찾아왔다. 그들과 같이 E.H.카의 <소비에트 혁명>, 스위즈의 <자본주의 비판이론>, 모리스 돕의 <자본주의 발달사> 등 여러 책을 전부 원서로 읽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는 망한다. 사회주의는 필연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순하고 순박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당시 상황과 환경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노동운동을 잠깐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노동운동을 깊이 하지는 않았다. 당시 내가 일하던 아남산업은 세계 최초로 전자오락기를 만든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사로에 기능품을 반제품으로 하청 수출하는 기업이었다. 이 전자오락기가 세계시장에서 엄청나게 팔렸다. 나는 생산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급증한 수요에 맞춰 물량을 대려니 8000여 명에 달하는 여공들에게 하루 12~16시간씩 무리하게 생산을 강요했다. 군 장교 출신인 미국인 총감독을 보조하면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내 여성 노동자들을 들볶았다. 그러다 보니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 잠깐 쉬는 시간에도 복도에서 고목 넘어지듯 푹푹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이를 보고 참다못해 감독하고 있던 미국인과 크게 싸우고, 사표를 던지고 나와 버렸다.

그렇게 회사에서 나와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야전잠바를 입고 부평 근처 공장을 전전했다. 그런데 아무리 취업을 하려해도 나를 받아주는 공장이 없었다. 다들 내 손을 보고는 ‘당신은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안 받아 주더라. 지금도 나는 당시 노동자로 취업했던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현장에 들어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결국 인천소재 대우중공업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는데, 며칠 만에 위에서 훈련생의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차마 그것을 견딜 순 없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들었던 생각은 ‘나라는 존재는 노동자들과 마음을 같이 할 수는 있어도, 내가 억지로 그 사람들 속에 함께 노동하면서 살 수는 없구나’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한계와 고백이었다. 그 길로 노동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던 몇 개월간의 방황을 접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소개로 한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에 취직을 하고도 계속 서울대 제적생들과 만나 토론회도 하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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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5년 만에 복학하니, 어떤 기분이 들었나?

1979년에 10.26 사건이 발생해 그 덕에 내가 졸지에 서울대 공대 제적생 대표로 복학하게 됐다. 새로운 인생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는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법대 대표로는 이범영, 사회대는 이해찬, 인문대는 이철, 의대는 서광태, 사대는 고은수 등이 있었다. 당시 서울대의 움직임은 복학생협의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군바리 전두환’이 전면에 등장한다고 잔뜩 긴장하고 복학생협의회를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복학생대표로 학교와 교수들에게 따질 것은 따지고 요구할 것은 요구했지만, 시위를 위해 대학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대신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모은 돈으로 대방동에 입시학원을 차려 박인배(현 세종문화회관 대표), 박우섭 등과 함께 저녁에는 중학생을 가르치면서 낮에는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군부 세력의 긴박한 움직임에 학생들의 시위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을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내가 운영한 입시학원에는 시간당 3000~5000매가 나오는 당시 최고급 윤전기가 있었다. 그러니 재학생 후배들이 시위가 있을 때면 밤마다 와서 윤전기를 쓰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5월 초에는 그것을 총학생회에 기증해버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기 하루 전날, 전국 대학교 학생회장단이 이화여대 앞에 총집결했는데 그 때 나는 집에 있었다. 학과 후배가 전화로 “선배님, 빨리 피하십시오. 경찰이 학생회장단을 다 연행해 갔습니다”라고 하길래, 곧바로 집을 나와 대방동 학원에서 며칠을 기거했다. 며칠 후, 후배들이 찾아와 “광주에서 큰일이 났습니다. 서울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라고 하길래, “같이 죽을 일 있느냐, 제발 좀 참아라”라고 말렸다. 하지만 결국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이 입시학원에서 제작됐고, 서울에서는 5월 23일 처음으로 구로공단에 뿌려졌다. 유인물을 나눠주던 후배들은 현장에서 다 잡혔고, 경찰은 나를 이해찬 선배와 이들과의 연결고리로 상황을 만들어 수배자 신세가 되었다. 6월 13일 계엄령 선포되면서 나를 포함한 100여 명에게 공개 수배령이 내려졌다. 친구 집에서 숨어서 TV를 보고 있는데, 수배자 명단에 내 이름이 ‘이래경’이 아니라 ‘이태경’으로 나온 것을 봤다.

또다시 내 인생이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혈우암으로 위독하니, 그만 자수하라고 했다. 고민 끝에 친형님을 만나러 나오다 그 자리에서 형사에게 잡혀 자수한 셈이 되었다. 이번에도 이모부 덕분에 그럭저럭 29일간 조사만 받고, 기소중지로 나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에서는 두 번째 제명을 당했기 때문에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다시 취업을 해야 했다.

무역회사에 다닐 때 문교부라는 이름으로 몇 차례 전화를 받았다. 어느 날 문교부(사실은 안기부) 직원들이 나를 시내 호텔 방으로 불러 ‘오사카, 동경, 베를린 중 네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해라. 돈은 우리가 다 제공하겠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대학교 교수 자리도 보장해 주겠다. 대신 해외에서 공부하는 동안 교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간 보고 해 달라’고 제안했다. 말 그대로 나를 그들의 끄나풀(앞잡이)을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기가 막혀서 웃었다. “내가 아무리 공부가 고프다고 한들, 그런 식으로 공부하겠나.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거다”라고 단호하게 거부했더니, 자기들이 제안한 것을 평생 입 닫고 비밀을 무덤에 갈 때까지 지키라고 협박했다. 이게 다 기무사, 보안사, 중앙정보부라고 하는 당시 첩보기관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을 끄나풀로,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일이다. 당시 대학교수 중 첩보기관 끄나풀로 공부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그들에게 들었다.

 

그렇게 사업을 가꾸고 키우는데 집중했다. 그렇다면, 고(故) 김근태 의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1983년 내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또는 민청련) 결성과정에 개입하면서 거기서 ‘김근태’라는 인물을 만났다. 초기 의장이 김근태였고, 부의장이 장영달과 이해찬, 상임위 의장이 최민화였다. 처음 나는 서울대 공대와 성균관대와 연락을 책임지는 간사 겸 상임위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민청련 중심 인물 중 하나가 된 셈이었다. 그러다 1년쯤 지나서 집안이 기울고 내 생활도 어려워져 민청련 상임위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민청련에서 나온 이후인 1985년, 남영동에서 ‘김근태 고문사건’이 터졌다. 그 소식을 듣고 정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고 또 미안했다. 당시 나는 1선도 아니고 2선도 아닌 3선에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청련 부설 민족민주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정세연구>라는 격월간지 발간 비용을 한 달에 50만 원씩 지원하는 일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아무리 내 상황이 어려워도 한 번도 지원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10년 동안 지원한 금액만 5000만 원 쯤 될 것이다. 당시로써는 꽤 큰돈이었다. 김근태 선배가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오피스텔을 빌려 여러 사람과 만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던 그가 1993년 가을 무렵 내게 ‘정치에 입문하려 하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때 우리가 만난 곳은 성북구 우이동 산골 속에 있던 ‘명상의 집’이라는 천주교 피정장소였다. 본인 성격에는 교수나 신부가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나마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에 입문하겠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이 이야기를 일부러 ‘명상의 집’ 예수님 상 밑에서 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하는 자신의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를 돕게 되었다. 1994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에도 계속 도와달라고 하니,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후원회 책임을 맡게 되었다. 당시 후원회 실무자가 지금 민주당 유은혜 의원이었고, 내가 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한반도 재단’을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근태 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옆에서 정치권을 보며 가장 힘들었던 점이나 안타까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근태가 제일 어려웠던 시기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역설적으로 DJ와 노무현 집권 10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근태 선배는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향은 DJ와 전적으로 공유하고 있었으나, 현실 접근에서는 매우 달랐다. 이 점에서 나는 DJ를 매우 정략적인 마키아벨리 형 인간이었다고 본다. 그는 동교동계라는 충성적 계파운동을 통해 필요하다면 구태의연한 타협적 정치를 했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피한 현실 정치였을 것이다. 반면, 김근태는 초짜라고 놀림을 당할 만큼 원리원칙을 대단히 중시한 철저한 민주주의자였다. 계파를 떠나 토론과 숙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여겼다. 평민당 대선 후보 선출방식 과정에서 이 둘의 의견이 충돌한 이후, DJ와 동교동계는 김근태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 같다. 실제로 DJ는 평민당 초기, 부총재로 김근태를 발탁한 것 외에는 그를 중용해서 함께한 적이 없다.

김근태와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애증관계였다. 김근태는 철저한 현실 파악 속에 지성과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반면, 노무현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 두 분의 차이는 니체가 쓴 <비극의 탄생>에서 나오는 아폴로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 같았다. 김근태가 아폴로적 인간이었다면, 노무현은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었다. 그 둘이 협력을 잘했다면 시너지 효과가 매우 컸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노무현은 본인이 대통령이 됐긴 했지만, 운동권의 대부로 실질적인 정통성을 갖고 있는 김근태에 대한 자격지심이 너무 컸던 것 같았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갈등했다. 어느 날은 내가 김근태 선배에게 “그냥 노무현을 밟아라”라고 직언했더니, “어떻게 만들어진 참여정부인데 그럴 수 있나. 내가 노무현 대통령과 싸우면 참여정부가 무너진다”고 하더라. 그렇게 나라 걱정 앞에는 한없이 심약한 양반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민주개혁진영의 내부가 차마 공개적으로 내놓고 말하지 못한, 속병을 앓는 자기모순과 같은 것이었다.

 

‘일촌공동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때 매우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 2003년 7월 인천 부평구 청천동에서 30대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철저한 고발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이 사건을 심각하게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대신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분양 원가를 공개하는 게 말이 되느냐, 장사꾼 논리대로 해야 한다’라는 참으로 한심한 발언을 했다. 김근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던 시절인 2004년 12월, 대구에서 다섯 살 남자 아이가 벽장 속에서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내가 김근태 장관을 대신해 부인인 인재근(현 민주당 의원) 씨와 함께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 현장 담당 사회 국장이 사건 브리핑을 하는데, 요지가 ‘이번 일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력·행정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었다’라고 말했다. 브리핑 도중에 내가 “때려치워라.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변명만 하고 있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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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계기로, 이제는 우리가 정부만을 믿어서는 안 되고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몰입된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 가고 있다’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성장과 출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상생하는 사회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 스스로 상생하는 문화, 인간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자는 결심으로 ‘일촌공동체’를 기획하고 2007년 3월에 법인으로 설립했다.

 

일촌공동체를 설립하고 난 후에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같은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이래경의 삶을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는가?

시대와 상황이 요구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부터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하면,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각 시대의 흐름에는 그때마다의 시대정신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는 ‘독립’은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그다음에는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경제발전’이 시대정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일등공신은 ‘박정희’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역할을 한 부분도 있지만, 최고 공신은 차라리 ‘조봉암’이었다. 만약 조봉암이 농지개혁을 계획하고 실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장면 정부 때 만들어 놓은 경제발전 초안에 기초해 자신이 쿠데타로 집권 한 뒤 이를 실천한 것이었다. 여기서 박정희를 평가하는 것은 자립경제의 기치로 중공업과 산업재 중심의 경제발전을 추진하고 이루어 냈다는 점이다. 제 3 세계에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이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였다. 유엔의 제1 아젠다가 바로 ‘인권(Human Right)’이고, 제2 아젠다가 ‘참정권’이다. 참정권은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민주국가라는 것은 국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지난 대선에서의 국가정보원(과거 안기부, 기무사) 등 권력기관의 개입은 민주적 기초와 원칙을 뒤흔드는 매우 중차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참정권 이후, 시대정신은 바로 ‘사회경제적 권리’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반 조건, 즉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바로 오늘날의 시대정신이다. ‘복지국가’는 우리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자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은 복지국가가 지향해야 할 철학을 단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안전보장(Human Security)’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단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최소한의 재화와 서비스의 제공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 내재한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적극적 개념으로 더욱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와 같은 논쟁을 보고 있으면, 그래서 참 한심하다. 복지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연의 위대한 산물 또는 하나님의 섭리적 창조물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개개인으로서 가치와 존엄은 예외 없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적 조건 안에서 어떻게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70년대 20대였던 이래경은 ‘정부 민주화’를 요구했다면, 2013년 60대 이래경은 국가를 상대로 ‘복지국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나?

청년일 때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대자적 의식과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막연한 분노감으로 운동을 했다. 어떤 정립된 체계나 사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게 바로 청년 정신이다. 이순(耳順)의 나이에 이른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와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가야한다고 하는 방향성을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며 살고 있다.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도 상당 부분 시간과 돈을 할애하고 있다. 어떻게 나의 몫을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나눌 수 있는가?

‘인간은 과연 도덕적인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본다. 이것은 매우 철학적이고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다. ‘도덕’에 관한 여러 입장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로 ‘도덕은 쓸데없는 것으로 인간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즐기며 살면 된다’고 하는 입장이 있다. 다른 하나는 ‘도덕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한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데 검증된 적합하고 실제적이며 정당한 게임의 법칙이다’라는 입장이 있다. 세 번째는 도덕이란 ‘인간으로써 마땅히 가지고 있는 내면의 핵심 의지다’라는 입장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세 번째 입장이다.

하나의 열린계가 스스로의 한계에 이르면, 이 장애를 뛰어넘기 위해 새로운 계로 이동하는데 이것을 ‘창발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 창발현상에 의해 자연계에서 생물계로, 그리고 인간계로 이동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대자적 의식을 한다. 마치 파스칼의 ‘나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혹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면서 창발현상으로써 인간이 완성된 것이다. 이 창발의 핵심에 바로 도덕적 의지가 있다. 도덕은 우리 내면에 빛나는 도덕률로 자리하면서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재창조의 작업으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능력을 갖춘다. 새로운 것들을 창조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름 내면의 도덕을 실현하고 있다.

 

개인의 몫과 공동체의 몫의 가치가 충돌하지는 않는가?

지금도 내 수입의 1/3은 세금, 1/3은 내 개인과 가족, 그리고 나머지는 다른 이들을 위해 쓴다. 1년에 1억 원이 넘는 금액을 지원한 지 벌써 7년 정도 됐다. 처음 결정할 때는 매우 주저했던 기억이 있지만, 이후에는 무심하리만큼 사무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더라.

다행히 내 처는 허영과 사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를 믿어주고 일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입도 언급도 하지 않는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내 기본 봉급은 생활비로 가져가지만, 그 외에 수입인 경영수당과 배당이익은 대부분 사회활동을 하는 지인이나 단체를 후원하는 데 쓴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끔은 ‘내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허영도 부리고 호사도 하고 싶다’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잠시 생각일 뿐 곧바로 떨쳐 버린다.

 

이래경에게 자유란?

인간이란 필연과 우연의 접점에서 자기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간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 아니 자유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또 ‘인간은 인간의 미래’라고 외쳤다. 참으로 멋진 선언이고 이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는 ‘나는 무엇이고 타자는 무엇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공동체가 먼저인가?’라는 중요한 화두가 반드시 발생한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불가의 용어 ‘불일(不一)이요 불이(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싶다. 결국 나와 타자는 분리가 무의미하게 서로 맞물려서 함께 간다는 뜻이다. 타자를 자기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진보’적인 것이고, 나아가 타자를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 ‘진보적 자유주의’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에 대한 자각을 통해 자연스레 ‘인간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인식의 기초 위에 동일한 존재로서 타자와 만날 때 비로소 연대가 있고 진보가 있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에게 자유란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타인을 향한 대한 대화이자 채찍질’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중용(中庸)>을 읽을 때마다 참 좋다. 보통 ‘중용’을 적당히 균형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성철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용은 ‘쌍차쌍조(雙差雙照)’다. ‘쌍차’란 양 끝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고, ‘쌍조’란 모든 것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좌와 우의 양 극단을 버려 그야말로 공(空)의 상태가 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쌍차(雙差)의 빈 마음, 청정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살펴본 후에야 ‘올바름’을 판단하는 게 바로 중용인 것이다. 도올 선생은 이것을 ‘호문(好問), 호찰好察), 집기양단(執基兩端)’이라고 설명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끝까지 살펴본 후, 양 끝을 모두 포용하여 판단한다’는 뜻이다.

젊은이들에게 치열하게 우리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부딪쳐 보고 무엇이든 실천해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도올의 중용 이야기를 빌어 세 가지 관점으로 이야기 한다면, 첫째는 ‘시중(時中)’으로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조차도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 이에 제한받고 규정된다고 할 때 오늘 이 시점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대정신 속에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보람된 것이다. 두 번째는 ‘능구(能久)’다. 공자가 ‘안회’라는 제자를 가리켜 ‘나는 어떤 결심하지만 달이 바뀌면 마음도 변하는데, 안회는 한 번 무언가를 결심하면 끝까지 지켜 간다’면서 늘 칭찬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의지를 가지고 지켜나가는 실천의지가 소중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곳에 젊음을 던져라! 마지막은 ‘지미(知味)’, 즉 ‘삶을 음미하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두세 번씩 식사를 하는데, 그 중에 음식의 참다운 맛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생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살피라는 것이다.

일촌공동체를 설립할 때 그 기본정신을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에게서 가지고 왔다. 첫 번째는 ‘경인경물(敬人敬物)’, 인간과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갖자는 뜻이다. 두 번째는 ‘심인심고(心人心告)’, 생활 속에서 만나는 타인을 사랑하고 걱정하며 그들을 위해 마음속 하느님(侍天主)에게 간절히 기도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은 ‘여인여락(與人與樂)’으로 사람들 속에 함께 머물면서 그 사람들과 삶의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락’은 기쁨과 더불어 슬픔, 아픔, 애달픔, 고통 등을 모두 포괄한다. 이 ‘삼인사상(三人思想)’을 일촌공동체를 통해 실현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동시에 삼인정신은 자유와 함께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고이자 내 삶의 잣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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