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희 이사]임영희, 병상에서 일어나다

by 사무처 posted Dec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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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정석구  |  일촌공동체 상임이사

3년 전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진 후 겨우 의식을 되찾았지만 이미 몸의 오른편은 모두 마비상태가 되었다. 화장실만이라도 혼자 힘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된 지루한 입원생활. 6인용 병실의 밤낮 없는 텔레비전 소음과 수면장애 등으로 몸무게는 계속 줄고 식욕조차 못 느끼는 시간이 일상처럼 반복됐다.

퇴원해서 병원 오가며 재활치료를 받기로 했다. 병원에서 권하는 보행용 보조기구도 습관적으로 의존하게 될까 해서 사용을 중단했다. 걸을 때 무릎과 발목에 힘이 없어 넘어지기도 했지만 보조기구를 다시 찾지 않았다. 그런 노력으로 꾸준히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은 여러모로 운신이 힘겹다. 면역력 약화로 대상포진이 생겨 얼마 전엔 안면마비 비슷한 구안와사 증세도 겪었다.

일촌공동체 임영희 운영위원. 1956년생.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중병을 겪고 있지만 꼿꼿하시다. 댁 근처로 찾아뵙겠다고 했지만 굳이 충정로 일촌 사무실로 나오셨다. “일촌공동체 사무처의 새 식구들과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하신다.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딛는 느린 걸음으로 꽤 힘들여 나오셨을 텐데, 커피 한 잔 외에 달리 뭘 더 드릴 게 마땅찮아 아쉬웠다. 대화를 마친 후엔 귀가를 위해 조심스레 한 걸음씩 옮겨 차를 타러 가시는 뒷모습 또한 아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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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 일촌공동체 창립을 준비할 때부터 선배님을 뵈었으니 벌써 7년 가까이 됐는데 늘 큰언니, 큰누나 같으세요. 크고 작은 행사나 회의가 있을 때면 항상 먼저 오셔서 이런저런 일 함께 준비하시고요, 일촌공동체 강원본부 창립할 때에는 참 귀한 기부도 하셨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임영희: 기부랄 것 까지도 없었어요.(웃음) 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유품으로 물려주신 금목걸이가 있었는데 그냥 가지고 있어봐야 제 며느리나 딸에게 물려줄 뿐일 테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게 쓰면 돌아가신 어머니도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마침 일촌공동체 초창기에 허영, 김산 등 젊은 친구들이 강원본부를 세운다기에 뭘 좀 거들 수 있을까 하다가 그 목걸이 갖다 준 거지요.

이런저런 행사 때 먼저 가서 준비할 일 거들고 오는 사람들 맞이하고 했던 건 제가 광주에서 사회단체 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경험 때문이었을 거예요. 상근자들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아니라 단체의 회원들이 각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면 그게 그렇게도 나한테 큰 힘이 되었고 결국 그런 게 그 단체의 힘이라는 걸 체감했던 거지요.

정석구: 사회단체 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면 당시 20대 청춘이셨을 것 같은데요. 그 내력 좀 들려주시지요.

임영희: 중학생 때부터 다닌 교회의 영향이 컸어요. 특히 1976~77년 경 광주YMCA 대학생성서모임에서 김천배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역사의식을 기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당시 함께 공부했던 <역사 위에 펼쳐진 성서의 드라마>, <나와 너>, <바보제>, <흑인 예수> 등의 책들이 아직도 기억나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국사나 세계사 과목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청년 시절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남미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게 되니까 내 안에 역사의식이 자라는 걸 느꼈어요. 시대를 넘어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고,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내 삶의 지표도 그 때 세웠어요.

그러니 당시 유신독재라는 불의한 권력과는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지요. 자연스럽게 이어진 기독청년협의회(EYC), 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활동 중에 부활절 벽화사건 등의 일로 유치장에 끌려가서 고문도 당하고 하다 보니 독재정권이 나를 활동가로 만들어주는구나 싶었어요. 1979년에 시국사건 구속자 부인들과 일반 시민들 50명 가량이 ‘송백회’라는 여성단체를 만들어 매주 한차례의 강연회를 열면서 구속자 옥바라지나 농성자 밥해주기 등을 했는데, 그 초창기 송백회의 간사를 맡으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던 거예요. 드러나지 않는 조직가 역할, 단체나 조직을 지속적으로 꾸려가기 위한 여러 가지 뒷일들을 많이 경험할 수 있었어요.

정석구: 1980년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 현장에서도 한 역할 하신 걸로 알려져 계십니다. 선배님의 젊은 시절 얘기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임영희: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겐 떠올리기도 괴롭지요. 그 때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실명, 반신불수, 홧병, 정신질환 등 후유증을 앓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저에게도 살아있는 게 죄라는, 소위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같은 게 있어요.

당시 민주화 이행을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몰아간 전두환 일당이 공수부대를 투입했을 때 저는 극단<광대>의 단원들과 함께 연극 대본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제가 광주YWCA 농촌부 위원이기도 해서 Y회관 안에서 연습을 하는데 밖에서 총소리가 나고 그래서 나가보니 여기저기서 시민들이 피흘리며 쓰러지는 상황이 일어난 거지요. 그냥 있을 수 없잖아요.

그렇게 시민항쟁에 가담하게 되면서 저희들은 Y회관 안에서 숙식하며 홍보조, 모금조, 취사조, 리본제작조 등으로 역할을 분담했고, 도청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함께 시민궐기대회도 주관했어요. 시민들의 저항으로 물러났던 공수부대가 며칠 후 다시 몰려오고, 시민군은 도청에서 결사항전으로 맞서기로 하면서 항쟁 마지막 날인 27일에는 빠질 사람은 빨리 나가도록 했고 여자들도 집에 가라고 밀어냈어요. 그렇게 해서 YWCA회관을 빠져나오는데 이미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졌고 저희 일행도 계엄군과 맞닥뜨렸는데 “우린 그냥 동네처녀들”이라고 둘러대고 그 상황을 모면했어요.

그 길로 곧장 서울로 갔고 6개월간 도피생활을 하면서 광주항쟁의 실상을 알리는 녹음테이프 제작 배포 따위의 작업을 하다가 광주로 다시 내려갔습니다. 그 후 불면증과 난소암, 유방암, 유선염 같은 신체적 후유증이 이어졌지만, 스러져간 열사들이나 살아서 저보다 더한 고통 지니고 사는 분들 생각하면서 이겨내려 애썼지요.

82년도엔 광주에서 문화운동 같이 하던 사람(오정묵PD, 작곡가 김종률과 ‘임을 위한 행진곡’ 음반작업을 함께 함)과 결혼도 했고, 아이를 키우면서 광주에서 참교육학부모회를 조직해서 초대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어요. 그 때 전국에서 최초로 어린이역사기행프로그램을 진행한 게 학부모들의 큰 호응을 받아 여러 지역들로 전파되었어요.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처럼 세상이 어려울 때엔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건 자본권력이 사람들을 압도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듯해요.

정석구: 제가 잘 모르긴 하지만 선배님께서 지금 겪고 계신 병환도 젊은 시절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임영희: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뇌출혈은 일반적으로 고혈압과 관련이 있다고들 하는데, 제가 사실 혈압이 높지는 않거든요.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겪고 난 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생긴 것 같아요. 그 땐 이런 병명도 없었지만 의사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 후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도 제 안에 그런 증세가 있는 걸 느껴요. 열사의 묘에라도 가서 마음을 다스려보려 해도 독재정권의 감시 때문에 그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시절, 그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는 정치와 정치인들, 5·18을 놓고 벌이는 가당찮은 논란 같은 것들을 겪어오면서 내적으로 화와 분노가 쌓였어요. 그런 현실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살아오다가 병을 키운 거 아닐까 여겨지기도 해요.

그래도 이렇게 장애를 얻고 보니 장애인들의 입장을 가까이 이해하게 된 건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하는 거요. 흔히 보는 장애인용 보도블럭 같은 것도 그저 준공검사 통과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해놓은 데가 많아요. 길가던 행인들이 나를 뒤돌아보는 시선도 불편하지요. 또 병상에 오래 누워있다 보니까 죽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과거에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는데 그런 상황들을 돌아보면서 내 주변이나 지닌 물건 등을 비롯해 내 삶을 늘 정리정돈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타인에 대해서나 내 인생에 대해 좀 더 폭넓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각을 얻게 된 거지요. 이런 걸 생각하면 감사해요.

정석구: 발병 전 늘 씩씩하시고 잘 웃으시던 선배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당시 모습 속에도 안으로는 여러 아픔들이 들어 있었던 거군요. 일촌공동체 창립과정에 함께 하시게 된 과정도 좀 들려주세요.

임영희: 일촌공동체를 함께 시작한 이래경, 최연, 김기정, 김영준 같은 분들과는 민주화운동공제회 등에서 자주 만나던 사이였지요. 이런 분들에게서 일촌공동체 얘기를 듣고 즐거운 에너지를 받았어요. 저는 그 전부터 내 인생 사회적 약자들 편에서 억울하고 마음 힘든 사람들과 함께 마음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이런 분들과 또 더 많은 새로운 이웃들과 함께 일촌공동체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을 엮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젊은 시절 불의한 정치권력을 무너뜨리면 새 세상이, 공동체적으로 더불어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 믿었는데, 군부독재가 무너진 뒤엔 자본권력이 득세하는 쪽으로 세상이 돌아가더라고요. 마치 끊임없이 굴러가는 공 같다 싶어요. 이런 세상에서 내가 끝까지 실천할 수 있는 게 자원봉사라고 생각해요. 한 때 광주시의회 의원 후보로 공천해주겠다는 제안도 받았지만 사양했어요. 정치인으로 살며 정치적 입지에 휩쓸려가기보다는 자원봉사 영역, 사회복지 영역에서 운동성을 살려갈 수 있기를 바랐어요.

특히 광주처럼 정치적 아픔을 많이 겪어온 지역에서는 사회운동을 해 온 사람들이 정치판 쪽으로 많이들 갔는데,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 속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풀뿌리운동이 취약해요. 저라도 역할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촌공동체 광부본부를 세우자고 초기제안을 했고 창립멤버로서 지금도 내 건강이 허락하는 만큼은 전용호 대표나 정광유 선생 같은 분들과 함께 광주지역 일촌공동체운동을 서로 의논하며 가고 있는 거지요.

정석구: 광주본부 뿐 아니라 우리법인의 운영위원이시기도 한데요, 끝으로 일촌공동체운동 전반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임영희: 요즘 일촌공동체 본부에서 지역조직들을 순회방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광주 방문 때에는 저도 같이 가볼까 하고 있어요.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각지역조직의 장단점들을 분석하는 자료를 만들어 내부적으로 함께 검토해야 할 거예요. 좋은 사례는 적극적으로 확산을 꾀해야겠고 반면 특정한 개인이 지나치게 조직을 좌우하는 경우에는 본부에서 어느 만큼의 관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동안 일촌복지아카데미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들을 엮어주는 틀이 있어야 할 거예요. 제가 그 2기 수강생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아카데미 관련해서 어디에서도 연락 한 번 받아보질 못한 것 같아요. 제가 병상에 누워있느라 연락을 받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요.

재정운영을 위해 후원회원이나 기부자들을 많이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분들이 뿌듯하고 착한 마음이 들게끔 잘 예우해드리는 게 또한 중요해요. 그 분들이 또 다른 후원자를 불러 모을 수도 있는 거고요. 물론 드러내는 예우의 밑바탕엔 진심과 성실함이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수많은 단체에서 이메일 뉴스레터들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열어보지도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일촌공동체 뉴스레터는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열어보고 싶게끔 계속해서 노력해주세요. 그 외에도 ‘한 말씀’할 게 많지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더 잘 아시는 것들일 거예요.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땐 열정도 넘쳐나고 사람도 모이곤 하지만 그게 지속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아요. 실패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요. 하지만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마음이 진실하고 성실하면 일은 실패할 수 있어도 사람은 남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일촌이고 공동체가 아닐까요. 우리들 마음이 팔촌처럼 되면 안되잖아요. 소소한 일에도 서로 관심가질 수 있는 조직문화나 시스템이 계속 자라나면 좋겠어요.

정석구: 몸도 불편하신데 긴 시간 말씀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 들으면서 깊이 생각할 게 많아졌습니다.

임영희: 네, 여러 얘기 했지만 그냥 순하게 써주세요. 제목은 ‘임영희, 병상에서 일어나다’로 달아주시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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