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보라”- 일촌공동체 신동수 이사 이야기 - 글 정석구 / 본회 상임이사 “사람은 저마다 등에 지고 온 돌덩이가 있어. 장마로 불어난 강을 건너려면 무거운 돌을 어깨에 메고 가야 떠내려가지 않아. 등짐이 바로 타고난 운명이야. 무겁다고 털어내버리면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갈 수밖에.” 최문희 작가의 장편소설 <이중섭>에 나오는 말이다. 중섭의 아내 이남덕이 가족생계에 무능한 화가남편과 부산의 피난민수용소 생활을 뒤로 하고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을 때, 어린 두 아들과의 생존이라는 버거운 돌덩이 등짐을 느끼며 과거 시어머니가 동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등에 진 돌덩이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를 터. 무거워보여도 거뜬히 또는 묵묵히 져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웬만한 사람들 다 지는 정도의 등짐으로 보이지만 유독 힘겨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됐든, 무겁다고 털어내버리지 않고 기어이 헤쳐 나가는 사람을 보면 든든하고 위로가 되기도 하고 때론 고맙도록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법인 신동수 이사(67세)에 대한 내 주관적 느낌이 딱 그렇다. 느낌이란 게 다 그런 건데 굳이 ‘주관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건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게 적기도 하거니와, 어느 자리에서건 당신 자신에 대해 드러내어 말씀하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다른 선배들이 대화할 때 간간이 “그 때 동수 형이…”, “당수 형이…”하는 몇 마디를 들었을 뿐이고 인터넷 검색 따위를 통해 그 몇 마디 말들의 전후 상황을 어림해본 정도였다. 말씀 좀 듣기 위해 지난 가을 양평으로 찾아가 뵈었던 그 날도 그랬다. “그저 막걸리나 한 잔 같이하면 되지 뭘 따로 얘기할 게 있다고…”라며 녹음 때문에 들이댄 스마트폰을 못내 불편해하셨고, 결국 인터뷰는 못한 채 땅거미 짙게 깔린 고구마 밭에 앉아 따라주시는 막걸리 몇 잔 받아먹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막걸리 대화라도 한 번 더 청하리라 잠시 생각했지만 대화기록을 남기려는 ‘불순한’ 내 의도와는 어차피 맞지 않는 자리가 될 터여서 그것도 그냥 미뤄두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여기에 신동수라는 이름을 ‘내 맘대로’ 쓰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자신의 ‘돌덩이 등짐’을 짊어진 채 “의미있겠다 싶은 일”로 묵묵히 평생을 살아오신 그 삶의 모습을 통해, 비록 턱없이 성긴 기술이 되겠지만, 나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각자 짊어진 ‘등짐’에 눌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의 힘을 더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다. 또 말씀하신대로 “일촌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는 못하지만 우리시대에 모색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촌공동체 창립 초기부터 지금껏 적잖은 후원을 계속해 오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유기농사업체로 시작한 풀무원식품의 초창기를 대학후배인 원혜영(현 국회의원)과 함께 일궈낸 이래 지금껏 삼십년 넘게 우리농업관련분야에 “어떤 거라도 기여해보려”하시는 그 뜻을 대강이나마 회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 욕심도 있다. 그는 저 유명하다는 ‘경기고 61회 삼총사’ 김근태(작고), 조영래(작고), 손학규(전 경기도지사)와 고교 동기다. 하지만 그는 그들보다 4년 늦게 대학진학을 했다. 가족의 생계 때문이었다. 부친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운 데다 고교 2학년 때 그 부친마저 별세하시는 바람에 홀어머니와 두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대학 진학을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그는 군대조차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징집영장을 받은 그는 병무청을 찾아가 “집안 사정으로 기피를 해야겠다”고 말하고는 소집에 불응했다고 한다. ‘당수(黨首)’로 불린 내력을 내가 물었을 때 “이름이 비슷하니까” 하시기에, 어쨌든 무슨 당의 당수냐고 되물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생이 된 저 친구들과 함께 독일문화원 같은 데서 어울리곤 했는데, 다들 돈이 없는 처지라 우스갯소리로 기아(飢餓)라도 골고루 나누자며 “기아민주당 결성” 운운한 끝에 이름이 비슷한 자신이 당수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대학진학 이후로도 선후배들에게 자주 당수로 불린 데에는 친한 동기끼리 하는 농담 이상의 그에 대한 존경심이나 그의 말없는 리더십에 대한 동의 같은 것이 배어있었다고 전해진다. 경기고 변론반 시절부터 가까이 어울렸던 친구 조영래의 거듭된 권유로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게 1969년이었다. 그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늦깎이 신입생이 된 심재권(현 국회의원)과 함께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라는 서울대 학내동아리를 조직하면서부터 그는 당대 반독재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배후인물로 꼽혔다. 모든 데모 모의 자리에 그가 있었고 어떤 자리에서도 결정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 꼭 사건이 터졌다는 증언도 여러 사람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그 자신은 “조영래 같은 친구들이 열심히 활동하기에 뒤따라 다녔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후배들에게 코 꿰어 같이 좀 다녔을 뿐”이라며 스스로 한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의 궤적을 추적한 경향신문 신동호 기자의 기사(‘긴조 9호세대 비화’, 2004, 주간경향)에 몇 사람의 말이 인용돼있다. “그를 보면 호치민이 생각난다. 진정한 혁명가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잡히지도 않았고 흔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홑점퍼 하나를 몇 년씩 입으며 프롤레타리아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지금도 결혼하지 않고 신부처럼 살고 있다. 그의 장점 중 하나가 공연이든 선언문이든 비평문이든 거기에 대한 미학적 조예가 깊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자극이 되고 혼란스러운 것이 잘 정리됐다. 그는 1970년대 운동의 모델이었다. 1960년대에 김지하가 있었다면 70년대에는 신동수가 있었다.”(장선우, 영화감독) “엄혹한 시절 내게 정서적으로나 체질적으로 가까웠던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동수씨가 영향을 많이 끼쳤다. 현실을 생각해서 (학생운동에서) 돌아서려 해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정서적 힘이 그에게 있었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같이 지내면서 저절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는 동생들을 부양하며 어렵게 지냈다. 그런 속에서도 관점을 놓지 않았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늘 화합시킬 수 있는 사람이 그였다. 1970년대에 그가 없었으면 아무 일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가 직접 뭔가를 하지는 않았지만…”(이호웅, 전 국회의원) “신동수는 내가 좋아했다. 나와 조영래-손학규를 도와주고 뒷받침했다. 그는 온갖 궂은 일 담당하고 생색은 전혀 안 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도 동수가 아니라 당수라고 불렀다.”(고 김근태, 전 국회의원) 그의 마지막 ‘작품’이 돼버린 1975년 서울대-경희대 연합데모계획이 공안당국에 포착되어 미수에 그치고, 배후주동자였던 그는 검거망을 피해 잠적했다가 2년 뒤에 누군가의 밀고로 붙잡혔다. 1년 6개월의 징역생활 후 출소해서는 “먹고살 일을 찾아야 했고 그게 의미 있는 일이면 좋겠고 해서” 원혜영과 함께 풀무원 유기농식품사업을 시작, 그 초기기반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원혜영의 말이다. “사실 그 때 나는 먹고살 것이 없어서 아버지가 하던 유기농 일을 하려고 했는데 동수형이 일찍이 그 가치와 비전을 일깨워 주었다. 그와 같이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풀무원은 없었을 거다.” 풀무원이 오늘날과 같은 대형 식품유통업체로 변신하려 할 때 그는 풀무원을 나와서 씨알살림축산이라는 축산물가공업체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 대표직을 맡고 있다. 가공장은 경기도 이천에 있지만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있는 생산농가들과 협의하여 생태적 건강성을 증진하기 위한 친환경 사료먹이기 등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고 한다. 또 선농생활이라는 2차가공업체에도 함께하고 있는데, 친환경축산물의 유통을 보다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어서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2012년에 발족한 ‘우리보리살림협동조합’ 대표를 맡아 정부의 보리수매제도 폐지에 자구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우리보리살리기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보리를 기를 수 있는 농지를 보존하고, 세계곡물시장에서 독점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초국적 곡물 메이저의 전횡으로부터 식량주권을 지키려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최근 귀농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그는, 안정된 직장이라는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사회현실 속에서 도시를 탈출하거나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흐름이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고 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정부가 철학을 갖고 정책적으로 끌고 나가야 하는데 그런 게 별로 없으니 민간에서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작은 엔진들을 만들어가는 게 필요하며, 그 자신도 과제로 여긴다고 했다. 이후 일촌공동체 활동이 농촌이나 농업부문으로 확장되면 그의 ‘과묵함’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여러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과거 ‘당수 시절’ 그리고 30년 넘게 생태적 농축업과 그 유통·가공분야에서 쌓아 오신 내공을 지금 말로 풀어내달라고 더 이상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망할 것 같다. 그럼에도 가족, 친구와 선후배, 사회와 시대상황이 지워준 ‘등짐’을 무겁다고 털어내버리지 않고 묵묵히 짊어져 온 그 삶의 자취는, 나의 이 성기고 어설픈 기술에도 불구하고 어느만큼은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 각자의 자기 등짐이 제법 버거워도 이런 분 생각하면 수시로 징징대거나 좌절모드로 빠지는 따위는 너무 가볍지 않은가. 다시 힘 낼만하지 않은가. [출처] [신동수 이사 이야기] "이 사람을 보라"|작성자 사단법인일촌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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