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영 일촌공동체 회장과의 대화
글. 정석구 / 일촌공동체 상임이사
지난 연말 버마(미얀마)의 민주화운동가 마웅저(Maung Zaw)씨가 한국에 온지 19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1988년 고교생 때 버마 민주화 항쟁에 참여하면서 군부의 탄압과 수배를 받던 중 1994년 한국으로 피신해 이주노동자 생활을 하며 버마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따비에’를 이끌어온 사람이다. 국내의 후원자들이 마련해 준 송별회에서 그는 “신철영 선생님”을 비롯한 몇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특별한 감사를 표했다. “저는 한 민주화운동가가 걸어가는 길을 잘 보여주는 신철영 선생님의 친 후배처럼 지내온 지 이제 10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2002년 말부터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있는 버마 난민 아이들 교육지원 활동을 한국에 있는 버마 이주민들과 같이 해왔는데요, (…) 이후 한국 시민들도 버마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2004년 신철영 선생님께서 ‘3년의 약속’이라는 기획 제안을 해주셔서 버마 난민 아이들 교육지원 활동은 부천지역에서 크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제가 버마 어린이-청소년 교육지원 활동을 계속 잘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철영 선생님에 대해 또 잊지 못할 게 있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니 힘내라’는 뜻으로 명절 며칠 전 마다 선물들을 가지고 찾아오신 신철영 선생님께 다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http://thabyae.tistory.com) 마웅저 씨의 말대로 신철영 회장(64세)은 70년대 학생운동, 80년대 노동운동,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시민운동에 몸담아 온 “한 민주화운동가”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공동의장, 21세기생협연대(현재의 아이쿱생협) 초대 회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 등 그가 역임한 굵직한 이력들만 나열하려해도 한참 걸릴 정도다. 열심히 사신 흔적 아니냐고 말씀을 건네니 “어쩌다 보니 복잡하게 살았다”고만 하신다. 그런 식의 ‘담백한’ 답변 뿐 그 흔한 ‘운동권 구라’나 ‘무용담’ 같은 건 전혀 들어볼 수 없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단체 대표자와의 대화로 [사람사이]를 열어본다.
- 충북 괴산으로 이사하실 예정이라고 들었다. “내가 참여해온 아이쿱생협에서 괴산에 친환경유기식품 클러스터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집행위원장 역할을 맡고 있다. 친환경가공식품공장과 과수원, 목장, 생태마을과 학교 등이 들어설 거다. 당초 계획보다 좀 늦어지고 있지만 나는 미리 들어가서 거기 살면서 단지를 조성해나가는 과정에 함께 하려 한다. 건물과 주택을 생태친화적으로 짓고 입주민들이 경제적 자립기반 위에 함께할 수 있는 마을공동체를 구상한다. 훈수만 두기 보단 직접 시도해보는 거다. 생활비가 도시보다 적게 들 테니 그것도 좋고. 개인적으로 농사지을 땅도 좀 사고 싶은데 그럴 돈이 될까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살고 있는 부천의 집이 어서 팔리면 좋겠다.” - 클러스터에 학교도 들어 있다. 어떤 모습의 학교일까 궁금하다. “계속 의논해가야 할 일이지만, 최소한 애들 들볶고 학대하는 그런 학교들과는 달라야겠지.(웃음) 지금처럼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교육으로는 사람교육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정부가 말하는 창의적 인재를 기대할 수도 없다. 80년대 초 징역생활 중 영국의 서머힐학교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지만 아이들의 문제해결능력이나 그 졸업생들의 사회적응력은 다른 일반학교 출신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한다. 자유로운 교육이 창의적 능력을 키워준 것이다. 문제해결의 길은 본래 다양하게 있는 거다.” - 신 회장님도 ‘그런’ 교육받고 최고 명문이라 하는 서울대에 들어가신 거 아닌가. “당시 내가 다닌 천안고에서 서울대에 다섯 명 들어갔다. 고교 시절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입시교육 하에서 그저 대입 시험만을 목표로 집중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니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데, 다른 건 다 시시해지더라. 내가 입학한 그 해엔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도 있었고… 그러던 중 공대 안에 산업사회연구회라는 동아리가 생겨서 2학년 때 가입했다. 노동문제를 놓고 공부하며 방학 땐 공장활동도 하고 하면서 내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다.” - 그렇게 해서 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나. “1978년 대학졸업 후 결혼에 따른 전세금 마련 따위로 돈이 필요해서 한양주택이라는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중동에 건설경기가 활발할 때였는데, 그 입찰준비서류를 만드는 일로 밤샘근무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바쁘게 일했지만 내가 오래 계속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초부터 회사는 한 1년만 다니고 공장활동으로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대학선배가 당시 공장지역이던 영등포의 도시산업선교회(산선)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고 난 별다른 고민 없이 그렇게 결정했다. 나중에 친구들이 뭐라 하더라. 넌 어떻게 의논 한 번 없이 그런 결정을 해버렸냐고.” - 친구들은 그렇다 치고 부인께서 반대하진 않으셨나. “학생운동하다 만난 사람이고 결혼 후에도 인생길 걸어가는 방향이 비슷하다 보니 그런 문제는 없었다. 당시 학생운동세력이라고 해봐야 시쳇말로 한줌도 되지 않는 소수에 불과했는데, 그런 만큼 학교가 달라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 내가 아내될 사람을 점찍어 구애를 한 거다. 나와 인생길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실제 다르지 않았다.” - 신 회장님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되었다. 당시 산선이나 학생운동 출신의 공장노동자들이라고 해봐야 그 규모나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 정도였다. 산업선교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중 자연스럽게 당시의 노동현안에 대해 의견 나누곤 했는데, 전두환정권은 그걸 갖고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반국가단체라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결성한 것으로 조작해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수사기관은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내서 소설 같은 공소장을 작문(作文)했고 재판부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형을 매기던 시절이었다. 결국 고문문제가 불거졌고 그에 항의하는 구속자 가족들의 운동이 드세게 일어나고 외국에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종교단체 등이 나서면서 전두환정권의 폭압이 소위 유화국면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나도 1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고 10개월가량 갇혀있던 중 2심에서 풀려났다. 80년대 중반 이후 대학사회나 사회운동에 이념서클들이 생겨나면서 노동운동도 사회주의 이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산선이라는 기독교단체 안에 그런 이념운동조직을 담게 되면 교회가 곤란해질 것이기에, 산선에서는 초보적인 노동자교육을 담당하고 더 적극적인 조직운동은 나가서 하는 것으로 내부적 결정을 내렸다. 당시엔 나도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노동자공동위원회 활동 등으로 이미 노동운동 전반에서의 역할과 책임이 커졌기에 산선을 나와서 88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를 결성하는데 참여했고, 후에 그 조직의 대표까지 맡게 됐다.” - 민중당에 참여하신 것도 그와 관련이 있었겠다. “1987년 양김(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인해 대통령선거에서 전두환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패배하게 되자 온 운동권이 큰 상처를 입었고 분열과 내홍이 이어졌다. 그 수습을 위해 전노운협과 농민운동조직 등이 연대해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라는 전선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전민련 내부에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합법정당 건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찬반 격론 끝에 합법정당을 추진하던 사람들이 전민련을 나와서 결성한 게 민중당이었다. 나도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얘기해왔으니 같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한테 선거에 나가라는 요구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랬지만 국회의원 총선에서 전국적으로 1.5%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면 법에 의해 정당해산이 돼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992년 총선 때 부천에서 민중당 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었다. 석 달가량 준비해서 내 지역구에서 9.5%득표를 했지만 민중당은 전국적으로 1.5%를 얻지 못해서 해산되고 말았다. 그 후 당 재건작업이 이어졌지만 당대표였던 김낙중 선생이 간첩혐의로 구속되면서 그나마 있던 동력조차 잃고 말았다.” - 그렇게 해서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에 전환점이 온 건가. “선거를 치르면서 합법정당운동을 노동자 기반만으로 하는 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노동운동 내부의 분파투쟁 방식에 대해서도 이건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회의가 몰려왔다. 싸우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내면에는 독선적 요소가 쌓이고 자기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몰아붙이고… 그래서 민주화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 식으로 내부싸움을 하느니 차라리 따로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노동자에 대한 애정은 컸지만 노동운동 판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지역주민 기반의 주체를 형성하고 사회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게 낫겠다 생각해서 부천에서 생협(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결성했다.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다. - 그게 벌써 20년이 되었다. 한국사회 시민운동의 흐름을 어떻게 보시는가. “경실련, 참여연대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시민사회성장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 단체는 시민주체 형성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지식인 위주의 ‘대리운동’, 요구운동(advocacy)을 위주로 했는데, 그 성과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런 활동들만으로는 시민사회의 지평을 더 넓혀내기 어렵다. ‘대리운동’의 한계를 넘어 시민들 스스로가 작게라도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스스로 실천하면서 주체를 확장해가는 운동이 함께 필요하다고 본다. 요즘 협동조합이나 마을공동체운동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책적 지원 여부와 무관하게 주체적 의지와 역량이 함께 성장하고, 참여하는 시민들이 그 안에서 민주주의 훈련을 쌓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어서 비록 ‘작은 섬’에 불과할지라도 시장만능주의나 경쟁지상주의·출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을 실험하면서, 이런 운동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강화해서 공공적 요구를 실현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거나 필요시 정치권의 동맹이 될 수 있는 운동까지도 지향해가야 할 것으로 본다.” - 거기에 우리 일촌공동체는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 “일촌공동체도 우리사회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주체를 새롭게 형성하는 노력을 사회복지분야에서 그동안 꾸준히 해오지 않았나. 관료적이거나 시혜적인 복지서비스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연대적 관계로 복지서비스가 이어지도록 하는 공동체복지의 주체들을 키워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작지만 나름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건 일정한 성취라고 생각한다. 다만 일촌공동체의 활동을 대중적으로 드러내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지금까지 지역별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그 중 중점적으로 키울 사업 한두 개 또는 두세 개를 선택해서 집중 지원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해서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일촌공동체의 대표적 사업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일촌공동체운동의 저변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일촌공동체를 모법인으로 하는 산하기관들의 경우도, 예컨대 방아골복지관이 일촌공동체를 모법인으로 한다고 할 때 여타의 기존 복지관들과는 무엇이 다른가를 쉽게 드러낼만한 설명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대중적으로 읽힐만한 책을 하나 낼 수도 있지 않겠나. 이것은 단지 대외적 홍보의 의미만이 아니라 지금 일촌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통적 인식을 모아가는 데에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날 신철영 회장과의 대화자리에 함께 있던 한 동료는 신 회장의 말씀을 들으며 인물현대사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여기에 활자로 다 옮기지 못했지만 한 사람이 사는 동안 겪은 거라고 하기엔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상황들 속에서 신 회장의 자기선택 기준은 “합리성”이나 “통합” 같은 가치가 아니었나 돌아보신다고 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옳고 그름의 논쟁 못지않게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하신다. 그 자신 역시 이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새롭게 이뤄내는 것 속에서 사람을 모으고 방향을 함께 찾아가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신단다.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그저 유(柔)한 신사로 보이는 이 어른 역시 평생에 걸쳐 자기 앞에 놓인 과제상황을 피하지 않고 충실히 직면해오셨기에, 세 번의 구속수감과 고문 등에 의한 극심한 고통 등을 감당하면서도 사회적으로 그렇게 많은 역할을 해낼 수 있지 않으셨을까 싶다. 두 시간 가량의 대화 내내 <중용>에 나오는 ‘군자의 중(中)’이 이런 건가 하는 느낌이 어슴프레하게 다가왔다. [출처] 신철영 일촌공동체 회장과의 대화 |작성자 사단법인일촌공동체 |